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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한 터널서 장애인 심정 이해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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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홍콩 사이언스 파크 안 골든 에그에 설치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안필연씨.

“홍콩에서 정부 돈을 받아 전시회를 여는 외국 작가는 제가 처음일 겁니다. 5년간 공을 들였으니 저도 꽤 끈질긴 편이죠. 기획자로부터 당신의 창의성을 높이 산다는 말을 듣고 보니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설치미술가 안필연(50·경기대 예술대학 교수)씨는 2006년부터 힘들게 추진한 전시회 개막식 날, “내게 장애인의 삶을 생각하도록 해준 이는 치매로 고생하는 어머니”라며 “이 전시를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오전 홍콩 주룽반도 북쪽 신도시에 자리한 ‘사이언스 파크(Science Park)’. 화창한 햇살 아래 부모 손을 잡은 장애아들이 줄지어 모여들고 있었다. 사이언스 파크(HKSP)는 홍콩 과학기술원이 아시아 IT 산업의 허브가 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의 하나로 2001년부터 육성해온 과학단지다. 한 뼘 땅이라도 아까워 다닥다닥 건물을 붙여 올리는 도심과 달리 널찍하게 설계된 건물들 사이로 홍콩인들이 자랑하는 ‘골든 에그’가 번쩍거린다.

안필연씨의 전시회 ‘아다마오(ADAMAO)’가 열린 곳이 바로 이 황금빛 계란 모양의 ‘골든 에그’란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오디토리엄 유리관 통로. 길이 54m, 폭 2.3m, 높이 2m의 종이 터널이 유리복도를 따라 구불구불 펼쳐져 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이 다면체 터널을 따라 허리를 구부리고 지나가면서 센서로 떨어지는 빛과 소리를 듣는 장애인들 얼굴이 밝아졌다.

“전시회 제목 ‘아다마오(ADAMAO)-언컴플라잉 터널(Uncomplying Tunnel)’은 장애인에게 빛을 주고 싶은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아다마오’는 그리스어로 빛을 의미하죠. 비장애인 위주로 되어있는 현실에 순종치 않는 터널, 빛을 찾아 더 멀리 바라보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장애인에게 가혹한 공공장소의 체험을 비장애인도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모든 곳을 더듬거리며 헤매야 하는 심정 말이죠.”

꽤 복잡한 다면체 터널 공사에 힘을 보탠 이들은 크라운·해태제과 그룹의 ‘박스 아트팀’. 과자 포장에 쓰려다 잘못 인쇄돼 버리게 된 재활 용지를 재료로 두 달 넘게 밤을 새며 고생했다. 과자를 만드는 이들은 조각을 알아야하고, ‘예술지수(AQ)’가 높아야한다는 윤영달 대표가 안필연 작가를 후원하면서 맺어진 인연이다.

“홍콩 과학기술원이 한 개인의 미술전시를 위해 우리 돈 5000만원을 내준 일은 사건이라는군요. 그만큼 장애인을 위한 공공성을 높이 사줬다는 의미겠지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크라운·해태가 기증한 초콜릿을 이번 터널 모습을 닮은 소형 상자 안에 넣어 관람객에게 나눠줬어요.”

이달 26일까지 이어질 전시에서 이 초콜릿 박스 9000개를 나눠 줄 예정이라고 밝힌 안씨는 “이들 중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내는 이들이 있으면 그 돈을 홍콩 장애인 단체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홍콩=글·사진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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