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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가진 자의 파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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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계에서 가장 적게 일하고 월급은 가장 많은 나라가 있다면 이곳이 바로 노동자의 천국이다. 독일을 흔히 노동자의 천국이라고들 한다. 1999년 기준으로 주당 평균노동시간 37.4시간에 노동자 평균월급 6천7백72마르크(약 4백만원), 휴가가 29.5일이다.

이것도 일하는 날만 치니까 주 5일 근무로 계산하면 6주나 된다. 기본적으로 '벤츠' 로 상징되는 기술력이 이같은 '노동 3관왕' , 즉 최단 노동시간.최고 급료.최장 휴가를 가능케 했다. 통일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정이 예전만은 못하지만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를 쟁취하기까지 노동자들의 피나는 투쟁도 있었다. 지금은 프랑스 노조의 파업이 유난을 떨지만 한때 IG메탈로 대변되는 막강한 독일 노조는 전세계 노조의 우상이었다. 아직도 독일인들은 파업을 일상의 일부로 인식, 대체로 이를 수긍한다. 버스나 지하철노조가 파업하면 군소리 없이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게 독일인이다.

그러나 딱 한번 예외가 있었다. 그들이 파업을 하자 모두가 비난을 퍼부었다. 언론들도 평소와는 달리 항의하는 승객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생생한 '육성' 을 전했다. 심지어 상위 단체인 독일 연합서비스노조(Verdi)까지 이들의 이기주의를 비난했다. 비난의 목소리는 한가지 톤이었다. "다른 직업보다 고소득층인 그들이 돈을 더 달라고 파업을 해?"

그들이 누구인가. 35%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지난달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파업을 한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조종사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급료가 유럽 최저수준으로 미국 델타항공의 3분의 2밖에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같은 회사의 지상근무 직원들까지 뻔뻔스럽다며 항의시위를 했다.

무려 4개월여를 끌어온 이들의 파업은 결국 지난 8일 타결됐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74) 전 외무장관이 18년간의 외무장관 경험을 살려 대타협을 이끌어 냈다.

같은 일이 이번엔 서울에서 벌어졌다. 월급 1천만원이 넘는 대한항공 조종사들의 파업에 국민적 비난이 쏟아지는 게 독일 상황과 흡사하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모두가 악만 쓸 뿐 겐셔처럼 모수자천(毛遂自薦)으로 나서 궂은 일을 떠맡아 해내는 경륜가가 우리에겐 없다. 가뭄 극복에 밤낮을 잊은 우리 국민은 이번 파업에 분노를 넘어 허탈해하고 있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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