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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썰렁한 6 · 15 한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해 오늘, 남북한의 정상들이 평양에서 만나는 장면은 한편의 압도적인 서사시(敍事詩)같은 것이었다. 7천만 코리안들은 사흘 동안 열광하고 마음껏 흥분했다. 두달이 지난 8.15에 중앙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남한사람의 82%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지지하고 약 57%가 10년 안에 통일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오늘, 그렇게 열광하던 한국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중앙일보가 6.15 한돌을 맞아 다시 실시한 여론조사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남북관계의 냉엄한 현실에 눈을 떴음을 보여준다. 金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는 58%로 떨어지고 10년 안에 통일이 된다고 믿는 사람은 30%밖에 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1년 사이에 이렇게 희망이 실망으로 바뀐 배경은 새삼스러운 설명이 필요없다. 6.15 공동선언의 합의가 전혀 실행에 옮겨지지 않은 탓이다. 제도적으로 정착될 것으로 선전된 이산가족 상봉은 세번, 장관급 회담은 네번 열리고는 중단됐다.

김정일(金正日)의 서울 답방은 봄에서 상반기로, 가을로, 그리고 다시 연내로 연기를 거듭하다가 이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로까지 후퇴했다.

6.15 한돌에 던지는 당연한 질문은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로 남은 것은 무엇인가다. 대북정책에 참여하고 있는 고위 소식통은 남북 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양쪽 정상들이 남북한의 오해를 풀고 상호 오판(誤判)의 위험요소를 해소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말은 6.15의 핵심적인 성과가 개념적인 것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그러나 지난해 오늘 우리들을 그토록 열광시킨 것은 단순히 두 정상 간의 개념적인 접근이 아니라 그런 개념적인 합의의 큰 그릇이 긴장완화와 이산가족들의 지속적인 왕래와 남북교류를 통한 한반도평화라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낼 것이라는 기대였다. 평양에서 돌아온 金대통령의 보고와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가 그런 기대를 증폭시키지 않았던가.

6.15 공동선언의 합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된 게 없다는 비판에 대해서 고위 당국자는 경제협력에 관한 4개의 합의가 있지 않으냐고 말한다. 이중과세 방지, 투자보장, 청산결제, 상사분쟁에 관한 합의를 말한다. 남북경제협력을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의미있는 합의들이다.

그러나 신뢰쌓기를 통한 긴장완화 조치가 없고, 이산가족 상봉이 중단되고, 서울에 온다던 김정일이 오지 않는데 국민들이 크게 실망하고, 북한 상선들이 공공연히 한국의 영해를 침범하는 분위기에서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를 남북 정상회담의 가시적인 성과로 내세우기는 계면쩍다.

김정일이 관망하는 자세를 계속하고 남북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진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부시행정부의 대북 강경론이다.

특히 지난 3월 金대통령의 워싱턴 방문기간에 부시 대통령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쏟아낸 살벌한 대북발언들은 부시를 설득하러 간 金대통령을 참으로 왜소하게 보이게 만들고 김정일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부시가 지난주 발표한 대북정책도 위안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외형상의 틀은 포용정책인데 내용은 공화당류의 강경노선 그대로다. 북한에 건설 중인 경수로의 핵심장비가 들어가기 전에 현장사찰을 통해서 북한 핵의 과거를 규명하고,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미사일의 개발과 수출을 중단하라고 한다.

특히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의 위협을 줄이라는 새로운 요구는 북한에는 부담이 되는 동시에 남북한이 앞으로 논의할 긴장완화 조치의 가장 중요한 의제를 가로채는 것이다. 경수로 건설의 지연에는 언급도 없다.

김정일은 한국의 당국자들에게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양보라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지난해 10월 이전에 미사일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게 애석하다. 부시 제안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김정일의 그런 자세가 반영되기를 바라는 것 말고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 6.15 한돌은 더욱 썰렁하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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