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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가 뛸 때 ‘외주’는 울었다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한국은 명실상부한 드라마 공화국이다. 국내 드라마 시청률이 30%를 훌쩍 넘는 경우가 많다. 어지간한 대형 광고주는 모두 인기 드라마 앞뒤에 광고를 붙이려 경쟁한다. 심지어 방송사 뉴스 시청률도 드라마에 따라 오르내린다. 드라마 한 편으로 대형 스타가 탄생한다. 메릴린치 등 해외 유명 투자은행도 한때 앞다퉈 드라마에 돈을 부었다. 일부 대기업은 아예 지분을 사들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미스터리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이 드라마 공화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드라마는 대박 행진인데 정작 드라마를 만든 제작사는 휘청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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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강남구 역삼동 초록뱀미디어 본사. 이 회사는 올해 가장 돋보이는 성과를 일궈낸 드라마 제작사다. ‘지붕 뚫고 하이킥’ ‘추노’를 연이어 흥행시켰다.

저작권 못 가진 제작사의 비애 … ‘지붕킥’ 이어 대박 터뜨린 초록뱀, 2년째 절반 자본잠식 #시청률 30%에도 못 웃는 외주 제작사

하지만 ‘추노’ 마지막 방송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찾은 초록뱀미디어는 조용했다. 이 회사 길경진 사장은 “드라마가 대박을 내도 제작사가 저작권을 소유하지 못하는 구조에서는 사실상 수익을 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초록뱀미디어는 지난 22일 코스닥 본부로부터 ‘2년 연속 자본잠식률이 50%를 넘어서 3월 31일까지 자본잠식 사유를 해소할 수 있는 재무제표와 감사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하면 상장폐지된다’는 공지를 받았다.

잇따른 대박 행렬에도 웃을 수 없는 이유다. 초록뱀미디어는 지난해 영업손실 38억1900만원에 순손실은 89억7900만원을 냈다. 길경진 사장은 “재작년 전 대표 당시 실적이 지금 반영된 것으로 폐지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길 사장은 “지난 2년간 ‘바람의 나라’ ‘일지매’ ‘크크섬의 비밀’ 등 잘된 작품이 많아 수익률이 30%에 육박한다”고 덧붙였다. 대박 드라마를 만들어낸 외주 드라마 제작사가 무너지고 있다. 이들의 붕괴는 이달 들어 가속화됐다.‘주몽’으로 대박을 치고 최근 ‘파스타’로 흥행공식을 다시 쓴 올리브나인은 4년 연속 영업적자와 순손실 누적으로 상장폐지 결정이 났다.

회사 측은 이의신청서를 제출한 상태다. ‘아내의 유혹’으로 유명한 스타맥스도 코스닥에서 상장폐지됐다. 스타맥스는 지난해 영업손실 21억3400만원을 기록했고 당기순손실은 76억5000만원에 달했다. 숱한 화제작을 만들고 배용준을 캐스팅한 ‘태왕사신기’로 2007년 코스닥에 입성한 김종학 프로덕션은 누적되는 영업적자를 기록한 뒤 ‘더체인지’라는 회사로 주인이 바뀌었다.

반면 대히트작을 낸 방송사는 축제 분위기다. MBC는 초록뱀미디어가 제작한 ‘지붕 뚫고 하이킥’만으로 광고수입과 기타 판권 등을 합치면 수백억원 상당의 매출을 올릴 것이라고 업계는 추산한다. KBS는 역시 초록뱀미디어의 ‘추노’가 평균 3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풍족한 한 해를 점치고 있다.

메이저 제작사 상장폐지 잇따라

KBS의 김신일 PD는 “하루 광고를 15억원 정도로 봤을 때 ‘추노’ 방영일의 절반은 이 드라마 때문에 들어온 광고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추노’ 1회당 직·간접적인 광고 매출이 7억5000만원이면 24회인 이 드라마의 본방송만으로 KBS는 180억원의 광고 매출을 올린 셈이다.

재방송 등을 합치면 광고 매출은 더 늘어난다. 스타 배우들도 드라마 대박을 자축하고 있다. ‘아이리스’의 이병헌은 회당 1억원 이상의 출연료를 벌어들여 연예계 최고의 블루칩에 등극했다. 연기 변신에 성공한 김소연도 전에 없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아이리스 제작사인 태원엔터테인먼트는 현재 극장판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초록뱀미디어의 위 두 작품은 평가도 좋다. 시트콤은 사회현상이 될 만큼 주목 받았고, 특별기획 드라마는 영화적 감각으로 칭찬 받고 있다. 모두 다 웃고 있지만 정작 이를 제작한 회사는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는 뭘까? 방송사와 제작사, 배우가 소속된 매니지먼트사 간에 평등한 수익의 배분이 이뤄질 수 없는 한국 드라마 산업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놓고서도 줄다리기가 벌어진다. 최근 들어 바뀌고는 있다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방송사가 저작권을 싹쓸이했다. 드라마 한 편이 방송을 타려면 무척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일반적으로 제작사가 대본과 스타급 주연 배우를 캐스팅한다. 제작사는 출연진과 내용을 들고 방송사를 찾아 방송을 탈 수 있는지 협의한다.

이 과정에서 방송사의 인력인 PD 등이 기획과정에 참여한다. 방송이 결정되면 제작사는 회당 3억원 가까이 돈을 들여 드라마를 만든다. 방송사는 이 방영권을 평균 1억~1억5000만원 정도에 구입한다. 제작에는 방송사가 깊숙이 참여한다. PD, 카메라맨 등 주요 인력이 파견되고 고가의 카메라 등 기자재도 투입된다.

현대극의 경우 회당 7000만원 이상 들어가는 미술비도 방송사가 낸다. 이 대가로 방송사는 저작권을 요구한다. 자본을 대지는 않았지만 제작 인프라를 투입했다는 이유다.

‘영업기밀’ 이유로 정보공개청구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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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는 방송 끝 무렵에 들어가는 ‘협찬’ 고지를 통해 수익을 내고 방송법 개정 이전에는 위법이지만 사실상 용인되던 제품간접광고(PPL)를 통해 상품을 노출시켜 제작비를 충당한다.

이창호 제이에스픽쳐스 이사는 “제작비는 한계가 있어서 손실을 협찬, PPL로 메워야 하는데 요즘 경기가 나빠 기업체나 지자체에서 지원해주는 게 현저하게 감소했다”며 “방송사가 제작사에 주는 금액이 현실에 맞게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2008년 2월 드라마제작사협회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지상파 방송 3사를 불공정 개래행위로 신고했다. 6개월 만에 무혐의 결정이 내려졌다. 공정위는 저작권 귀속 주체가 불분명하고 통상적 거래 관행이 없으며 불이익 규모를 산정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를 제시했다.

그러나 계약 당사자와 금액이 존재하는데도 이와 같은 결정이 내려진 것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많다. 건국대 법학과 이재경 교수는 2008년 12월 ‘법조’ 627호에 ‘우리나라 드라마의 저작권 귀속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드라마 제작사들의 법률적인 보호장치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정부도 이를 바로잡기 위해 표준계약서, 가이드라인을 제정했으나 현실에서는 전혀 구속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또 “시장지배적 지위에 있는 지상파 방송 사업자들이 납품계약에 드라마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괄적으로 양도 받아 제작사의 계약상 본질적인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김영덕 수석연구원은 “저작권 문제는 명확한 선을 긋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방송을 타지 않으면 미완성 상품이므로 방송사가 1차적(본방)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저작권의 주체는 창작 의지이기 때문에 제작사에 최종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제작사가 방송국과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한 방법으로 작가 외에도 매니지먼트사를 설립해 배우 공급력을 확대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본지는 표준계약 준수, 불공정 거래 여부 등을 확인하기 위해 공영방송인 KBS에 이 회사가 초록뱀미디어와 공동투자해 설립한 ‘바람의 나라 문화산업전문회사’의 재무제표를 포함한 항목별 비용과 수익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했으나 “경영, 영업상 비밀에 관한 사항으로 이를 공개할 경우 드라마 제작사의 노하우가 경쟁사에 유출돼 정당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정보공개청구 대상이 아닌 MBC에는 2009년 외주 제작한 드라마의 계약금액 등을 밝혀달라는 본지의 요청으로 방송통신위원회가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MBC는 “취재 목적인지 믿을 수 없고, 종편을 준비 중인 중앙일보에 영업상 비밀을 주려는 것 아니냐”며 “공개할 의무도 없다”고 취재를 거부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드라마 제작사 임원은 “산업적으로 접근하려면 투명하게 계약이 이뤄져야 하지만 일부는 구두계약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다”며 “한동안 들어왔던 해외자본도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불투명함 때문에 최근에는 투자를 극도로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사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모든 드라마가 다 잘 되는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추노’의 김신일 PD는 “드라마 10편 중 손익분기점을 넘는 건 2편 정도”라며 “1억5000만원을 투자했는데 최악의 경우 광고가 1개 정도 붙을 경우에는 방송사가 회당 1억4000만원가량 적자를 보는 셈”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한류 이후 급속하게 늘어나는 스타 배우 출연료와 전체 제작비도 문제라는 주장이다.

KBS 드라마국의 최지영 책임프로듀서는 “국내 시장에서 드라마 제작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제작비가 치솟았다”며 “제작사가 순수 외주제작으로 사전제작까지 마친다면 방송사는 광고료만 갖고 저작권은 제작사가 가져가면 되지만 제작사도 이런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최지영 책임프로듀서는 “일부 스타 배우의 몸값이 제작비 총액의 절반 가까이 되는 상황이 지속되면 드라마에 자본의 재투자가 이뤄지지 않게 되고 이는 곧 콘텐트 품질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 출연료가 제작비 총액의 30%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매니지먼트 회사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생 제작사나 상장사가 해외시장에서 알아주는 한류 스타를 출연시키기 위해 초래한 일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일부 한류급 스타 외에는 오히려 배우들의 처우가 더 나빠졌다는 지적도 있다. iHQ의 한 임원은 “한번 올라간 출연료를 인위적으로 방송 3사 국장이 모여 상한선을 그어봤자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2의 한류는 제작사 영업력에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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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잘 됐다는데 돈을 벌었다는 사람이 안 나온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첫걸음은 흥행에 성공한 드라마의 수익이 투명하게 배분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향후 재투자 주체나 권리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분쟁을 방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알 수 있는 페이퍼컴퍼니 형태의 문화산업전문회사가 그 대안으로 주목 받고 있다. 초록뱀미디어와 KBS는 3년 전 ‘바람의 나라 문화산업전문회사’를 세웠다.

투자 지분에 따라 수익을 배분하면 저작권 문제에서도 자유로워진다. 이어서 올해 ‘추노’에도 이 모델을 적용했다. 특히 제작비가 많은 블록버스터급 작품은 특수목적회사인 SPC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투자에서 집행, 수익 배분까지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의 범위도 확대할 수 있다.

해외 투자자가 들어올 수도 있고, 주연 배우가 출연료 일부를 지분으로 확보해 수익에 따라 러닝 개런티를 받는 방식으로 유도하면 초기 제작비용도 상당 부분 줄어들 수 있다. 지금까지 ‘태왕사신기’ ‘베토벤 바이러스’ ‘제중원’ 등이 문화산업전문회사에서 만들어졌다.

문화체육관광부 김철민 문화산업정책과장은 “문화산업전문회사 제도는 문화산업의 자금 모집이 위험성 때문에 어렵다는 얘기가 있어 독립투자 계기를 만들어 주려고 한 것”이라며 “펀드를 조성하려면 자본시장 통합법상 금융감독원에 등록해 투자자를 모집해야 해 절차가 복잡했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투자사와 제작사의 관계에서 항상 문제가 됐던 게 회계의 투명성 확보였다”며 “제작사가 여러 개의 문화산업전문회사를 세우는 것은 인정되지만, 그 전에 기존 회사가 어느 정도 정산이 끝나고 그 시점의 회계 투명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SPC가 확대돼 투자 투명성이 확보돼도 결국 국내시장 자체가 좁아 제작비 대비 수익률이 낮다면 악순환은 계속된다.

이를 해결하려면 신규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제언이다. 제2의 한류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최지영 책임프로듀서는 중화권을 지목했다. 당장은 중국 내 검열이나 저작권 문제가 불투명하지만 향후 한류 확대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라고 설명했다.

김종도 나무액터스 사장은 중동, 미국 내 히스패닉 인구 등 가족을 중요시하는 전통이 있는 시청인구 확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방송사가 해외 판매를 담당하기보다는 당장 이해관계가 직결된 제작사에 판권을 넘겨 이들이 직접 시장을 개척해야 더 경쟁력이 있다고 덧붙였다.

한정연 기자, 김강호·경계영 인턴기자 jay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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