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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도 경영도 위기가 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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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가을비가 촉촉이 내린 지난 2일. 경기도 안양 베네스트골프장의 클럽하우스엔 머리가 허옇게 센 노신사들이 모여들었다. 팔순을 넘긴 김복용(84) 매일유업 회장은 다른 사람에게 모자를 벗으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의 나이는 코스닥 등록기업의 현역 최고경영자(CEO) 중 최고령이다. 하지만 이날 열린 재계 원로 골프모임인 '장춘회' 회원의 평균연령쯤 된다.

장춘회 멤버에는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역전의 용사가 적지 않다. 윤명의(92)전 대홍기획 회장, 송인상(90) 능률협회 회장, 문상철(89) 전 신동아화재 회장 등이 있다. 이날 회원 8명이 2개조로 나눠 라운딩을 했다. 장춘회에선 골프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 스코어도 기록하지 않는다. 그린 위에서 '3회 이상 퍼팅 금지'라는 엄격한(?) 룰도 있다. 그래도 실력자는 있다. 최근 건강이 안 좋아 필드에 못 나가는 윤명의 회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이지 슈터'였다. 에이지 슈터는 자기 나이보다 적은 타수를 치는 사람을 가리킨다.

미수(88세)가 넘은 나이에도 꼿꼿한 모습을 잃지 않는 송 회장은 골프 예찬론을 폈다. 그는 "정신수양에 도움이 되는 골프가 점차 대중화가 되고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배구선수도 해봤는데 골프만한 스포츠가 없다. 다른 구기(球技)는 상대와 공을 주고받지만 골프는 혼자 공을 친다"며 "잘해도 못해도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송 회장은 골프를 새옹지마(塞翁之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해저드에 빠져 점수를 잃어도 다음 홀에 버디를 잡을 수 있다. 회사 경영도 마찬가지다.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라운드 도중에 세태를 걱정하는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날 한 회원은 "요즘 우리 사회가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을 보면서 다들 안타까워한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두달 전에 시장 개방을 안 하면 우리 모두 죽는다는 말을 언론에 했는데 이 기사를 본 주변 사람들의 격려 전화가 적지 않았다"며 "정치나 경제나 물처럼 흘러가야지 떼를 써선 안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원은 후배 경영인을 칭찬했다. "세계적 기업을 일궈 반듯한 일자리를 만드는 경영인을 보면 대견하다"고 말했다. 장춘회 멤버의 생활은 검소하다. 10년이 다 된 골프채를 국산 골프백에 넣고 다녔다. 라운드 비용은 물론 회식비도 100원 단위까지 정확히 나눠 더치페이를 한다. 김 회장은 "자수성가한 창업세대여서 돈의 귀함을 잘 안다"고 말했다. 20년 동안 장춘회 모임을 지켜본 안양골프장 관계자는 "이들의 골프 매너나 마음 씀씀이는 후배들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라운드가 끝난 뒤 주근원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의 생일잔치를 겸해 조촐한 회식자리가 있었다. 마시다 남은 양주로 축배를 나눴다. 이들은 자리를 파하기 직전에 장춘회의 '교가'격인 '고향의 봄'을 합창했다. 북한에 고향을 둔 일부 회원의 눈가엔 안개가 서렸다.

안양=이철재 기자

◆ 장춘(長春)회='항상 젊게 살자'는 뜻으로 지어졌다. 1920년대 경제계.학계 인사들의 친목 골프 모임이었던 '담수회'가 이 모임의 전신이다. 회원의 숫자는 20명을 안 넘는 게 불문율이다. 현 회원은 19명이다. 70세 이상만 가입이 가능하며, 신입회원은 만장일치로 뽑는다. 재계 원로들이 주축이지만 장우성 화백,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 주근원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등도 멤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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