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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기행] 서낭대 놀이 20년만에 재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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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마을 가운데 3백년된 회나무 밑에 돼지머리가 얹힌 제단이 차려졌다.초여름 기운으로 잎이 무성해진 회나무가 하늘을 가렸다.

제단 옆에는 울긋불긋한 천이 매달린 장대(서낭대)를 흰색 한복차림의 마을 노인(서낭대 잡이)이 잡고 서 있다.그 회나무 위로 제관의 낭낭한 축문 읽는 소리가 퍼져 나간다.

"서낭신 님은 제주를 음향 하옵소서.덕곡면민들의 태평,오곡 풍요,무병장수를 기원드리오니 보살펴 주옵소서…."

지난달 26일 오전 11시.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밤마리 마을.

해방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춘 서낭대 놀이가 덕곡면(http://www.tokkok.or.kr)주민들에 의해 처음으로 복원됐다. 이 마을은 통영 ·고성 등 남부형 오광대의 발상지였다.

낙동강변의 큰 포구였던 이 마을에는 뱃길을 따라 남해안에서 올라온 수산물과 경남 ·북의 농산물이 교환되는 커다란 장터였다. 이러한 지리적 영향으로 이 마을의 오광대가 남쪽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제관의 축문낭독이 끝난 후 50여명의 마을 주민들이 절을 하며 마을의 화합을 빌었다.

서낭대 주변에서는 마을사람들과 농악대가 어울린 농악놀이가 펼쳐진다. 이 때 서낭신이 서낭대로 내려 온다고 전해진다.

길이 12m쯤 되는 서낭대가 떨리면 서낭신 내림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날 서낭대 놀이에서 신내림 현상은 없었지만 20여년만에 햇빛을 본 서낭대는 하늘을 찌를 듯한 위엄과 신비감을 발하고 있었다.

한바탕 농악놀이가 끝난 뒤 모든 마을 사람들은 서낭대를 앞세우고 마을 뒤 낙동강 둔치로 나간다.

강둑이 없었던 옛날에는 서낭대가 멈춰선 지점이 바로 여름철 강물의 최고수위였다.마을 사람들은 서낭신이 가르쳐 준 그해 홍수 수위를 기준으로 농사에 대비했었다.낙동강변이어서 해마다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이 마을 사람들은 서낭신의 보호로 홍수의 두려움을 이겨냈었다.

이날 서낭대를 잡은 류인식(66)씨는 "서낭대 잡이는 서낭신의 이끌림에 따라 서낭대만 들고 갈 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인다"며 "신내림을 경험했던 존경받는 마을 노인들이 주로 서낭대를 잡았다"고 회고했다.

그해 여름 낙동강 수위를 확인한 주민들은 다시 서낭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밟기를 한다.

"주인 주인 문여소.나그네 손님 들어가요.주인 양반 온갓 태평 누리시고,자손대대로 형제간에 우애있고,잡신은 물 알로(아래로)가고,만복만 요집(이집에)오소."

마당에 간단한 음식을 차려 낸 집주인의 염원을 읽은 듯 소리꾼이 불러 제끼는 사설이 더욱 우렁차다.

사립문 앞에서 시작된 소리꾼의 성주풀이는 마당을 한바퀴 돌면서 10여분동안 그 집의 복을 빈다.소리꾼의 익살스런 대사에는 주민들이 박수를 치며 함박 웃음을 터뜨린다.

이날 서낭대를 앞세운 농악대가 찾아간 집은 모두 10여가구였지만 옛날에는 마을의 모든 집을 돌았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최호준(47)면장은 "서낭대가 내려 받은 서낭신을 집집마다 골고루 나눠주며 마을의 안녕을 비는 의식"이라고 설명했다.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벌어진 서낭대 놀이 덕택에 이 마을에는 항상 웃음과 풍년이 넘쳐 났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때 이러한 서낭당 놀이는 거의 사라졌다.일제가 마을의 단합을 도모하는 이러한 민속행사를 모두 없애버렸기 때문.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해방후 서낭대 놀이를 다시 시작,70년대 후반까지 계속했었다.

이날 행사에 사용된 서낭대에는 '甲子年(1924년)二月初日'이라고 적힌 깃발이 달려 있어 77년 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이었다.

이번 서낭대 놀이는 덕곡면이 추진중인 밤마리 문화관광마을 조성 프로그램의 자문을 맡은 안동대 김명자 교수팀이 원형대로 보관돼 있는 서낭대를 보고 서낭대 놀이 재현을 권장해 이뤄졌다.덕곡면 오광대 전승 보존위원회가 구성돼 마을 노인들의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덕곡면은 이 서낭대 놀이를 해마다 정월 보름,음력 2월 초하루,3월 삼짓날,4월 초파일 등에 공연할 계획이다.

마을을 한바퀴 돌고 난 서낭대 놀이패는 마무리 사설을 늘어 놓았다.

"이 마을 아들 ·딸들 발소리는 향내나고,걸음걸이는 꽃이 피고,고이고이 길러서 나라 일하는 정승되게 해주소…."

합천=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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