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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용어화 찬반 논쟁 가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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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영어를 우리 국어와 함께 공용어로 삼는 일이 가능한가.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편입하는 것이 우리의 생존 전략이며, 이를 위해 영어의 공용어화가 주요한 방안이라는 주장은 1998년 소설가 복거일씨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국내에는 그 논쟁의 대표격인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 아사히신문 전 워싱턴 특파원의 『나는 왜 영어 공용어론을 주장하는가』(중앙M&B)라는 책이 얼마전 선보이기도 했다. 학술 계간지 '사회비평' 여름호도 '영어의 정치학' 이란 주제로 이 문제를 특집으로 꾸며 쟁점화했다.

◇ 논쟁의 전개=잠잠했던 논쟁은 민주당이 지난 16일 제주도를 국제자유도시로 만들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제주도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프랑스 J사가 마련한 이 안은 제주도를 싱가포르 등 국제적인 자유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 안이 보도되면서 사회 각계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일었고, 국어정책을 주관하는 문화관광부에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 논쟁의 양상〓영어 공용어화를 둘러싼 찬반의 논란은 크게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 혹은 보편성 대 특수성의 주장으로 엇갈려왔다. 예컨대 일본의 후나바시는 "세계화가 가속되고 인터넷이 일상화한 시대인 21세기에 한 나라의 경제적 지위와 국제적 위상은 그 나라 국민의 영어 구사능력에 달려 있다" 고 말한다. 복거일씨의 문제 제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화 시대에 언어의 장벽으로 인한 엄청난 손해" 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시대에 약소국으로서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는 현실적 방안으로 영어 공용화만이 '살 길' 이라는 얘기다. 다만 복씨는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한국어를 영어로 아예 대체해야 한다" 는 강경론을 펴 불필요한 반응을 야기했고, 이후 효과적 논쟁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아직은 반대론이 절대 우세하다. 무엇보다 언어라는 것을 단지 수단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민족의 특수성이 반대의 기본 전제다.

윤지관(덕성여대 영문과) 교수는 '사회비평' 에 실은 글에서 "영어에 대한 숭배에 빠져 모국어가 자신의 삶에서 갖는 의미조차 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언어에서 유배당한 사람들" 이라고 말한다.

윤교수는 "영어 구사력으로 얻는 알량한 경쟁력은 언제나 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경쟁력이지, 그것이 경쟁력의 본질일 수는 없다" 며 "영어 구사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자존과 전문가로서의 식견 및 실력에서 나오는 당당함이 더 효과적인 경쟁력일 수 있다" 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문화관광부도 마찬가지다.

김한길 장관은 29일 "하나의 모국어를 쓰는 나라가 영어 사용국의 식민지도 아니었으면서 자진해 영어를 공용어로 택한 경우는 지구상에 한 나라도 없다" 며 절대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 현실적 대안은 없는가=함재봉(연세대 정외과)교수는 영어 공용어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자는 쪽이다. 그는 이 문제를 경제의 경쟁력 향상 차원이 아닌 서구의 인문주의적 가치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본다는 점에서 복거일씨의 주장과 구별된다.

그는 "자유.민주.박애 등 서구 인문주의와 시민사회의 가치는 이 시대 거부할 수 없는 보편성을 갖는 것" 이라며 "이러한 보편적 가치를 제대로 습득하는 것을 국제어인 영어를 공부하는 목표로서 중요시해야 하고, 이를 위해 영어 공용어는 고려해볼 만한 방법적 수단" 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약소국이 주류 문명과 타협하면서 자신의 생존과 정체성을 유지해온 것이 역사적 현실" 이라며 "영어 공영어를 제기한다고 해서 반민족주의자로 폄하하며 논의 자체를 거부해선 안된다" 고 말했다.

영어 공용어화는 너무 나간 발상이지만 영어교육의 중요성에 비해 잘못된 교육제도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적잖다.

한학성(경희대 영어교육과)교수는 "영어 공용어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우리 나라의 영어 교육이 실패했기 때문에 오는 역작용이며, 이를 공용어화가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 이라며 "영어 교사 양성 및 수업방식을 획기적으로 개혁하는 식이 돼야 한다" 고 말했다.

정재왈.배영대.김정수 기자

<영어 공용어론 관련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복거일, 문학과지성사, 98년) - 처음으로 영어 공용어론을 촉발시킨 책. 한국어를 영어로 '대체' 하자는 파격적 주장을 담았다.

▶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개의 풍경화(고종석, 개마고원, 99년) - 인류 문화의 역사는 곧 감염의 역사이고 그 문화를 실어 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라고 주장. 순수 언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

▶나는 고발한다(김영명, 한겨레신문사, 2000년) -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영어 공용어론의 허구성을 공격했다. 영어 공용어론은 세계주의를 가장한 제국주의 혹은 사대주의라고 주장.

▶한국의 주체성(탁석산, 책세상, 2000년) - 우리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세계어로서의 영어를 익히자는 현실론적 입장을 담았다.

▶영어 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한학성, 책세상, 2000년) - 영어 공용어론을 '영어 교육 실패' 의 역작용으로 꼬집으며 실현 불가능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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