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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7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74. 평생 모은 책 기증

5공이 막을 내린 직후 나는 지금은 고인이 된 최종현(崔鍾賢)SK그룹 회장과 마주친 일이 있다. 그 때 그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어, 이제 실업자 되셨네"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나로선 아시아개발은행(ADB)행이 결정돼 있을 때였다. 내 식대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씩 웃고 말았지만, 속으로 나는 '당신한테 몸을 맡기는 일은 없을 거요' 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고인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미 적은 대로 사람들이 공무원한테 고개를 숙일 땐 앉아 있는 책상을 보고 그러는 것이란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공직자는 그저 그때그때 맡은 일을 묵묵히 하면 된다. 그뿐이다. 공직에 있으면서 무슨 덕을 볼 생각을 해선 안 된다.

막상 마치고 나오면 차 한 잔 하자는 사람도 드물지만 이 역시 당연한 일이다. 임기를 마친 공직자에게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전관(前官)에게서 얻어 낼 게 있다면 그 편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나는 지난 20일 그 동안 모은 책을 마지막 직장이었던 한진그룹이 운영하는 인하대 도서관에 기증했다. 젊은 날 용돈의 대부분을 투자해 모은 책들이다. 트럭 두대 분량의 3천권 가까운 책을 떠나 보내며 나는 마치 딸을 치우는 듯한 감상에 젖었다.

그러나 그것이 책을 영구히 보존하는 길이기에 한편으로는 흡족했다. 가치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손을 타 봤자 나중에 과일 싸는 봉지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일로 나는 책을 모으는 방법에 관해 생각하게 됐다. 비교적 책을 많이 모았기 때문에 나는 선뜻 기증할 생각을 했지만 전문 서적이 얼마 안 되는 사람들로선 이렇게 내 놓는다는 것도 쑥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 일에 각 학교 동창회가 나서면 어떨까 싶다. 동기회별로 책을 모아 '몇 회 문고' 하는 식으로 학교에 기증하는 것이다.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한 동기들이 내 놓는 책들이니 모아 놓으면 아마 한 시대를 조망하는 서가(書架)가 될 것이다. 관건은 저마다 소장하고 있는 책들이 흩어지지 않게 해 후진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첫 회에 나는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시신은 화장해 바다에 뿌려 달라' 는 나의 유언을 공개했다.

1998년 작성한 이 유언장에는 ①72시간이 지나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거나 ②72시간 안에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희박할 때 또는 ③뇌사 상태거나 식물인간이 됐을 때 생명유지 보조장치를 사용하지 말고 사용중인 생명유지 보조장치도 모두 제거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민.형사상은 물론이고 도덕적.사회적으로 어떤 책임도 없다고 밝혔다. 요즘 말하는 이른바 소극적 안락사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매장 풍습을 많이 따르고 있다. 이 때문에 금수강산이 묘지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5.16 후 군사정부는 화장법을 만들려고 했었다. 고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그러나 유림의 반대로 뜻을 꺾고 말았다.

40년 전 일이니 그 때는 어쩌면 시기상조였는지도 모르겠다. 박대통령에 대해 나는 '육영수(陸英修)여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화장을 하고 스스로도 화장을 유언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면 결과적으로, 아마도 이 나라 경제발전의 견인차로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고 말한 것 이상으로 민족에 공헌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 유언장에 얼마 전 장례식은 사양하지만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틀어 달라는 내용을 덧붙였다. 고 천상병(千祥炳)시인의 시구대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하늘로 돌아가는 내 넋을 위로해 사람들이 미사곡을 틀게 하는 사치 정도는 부려도 좋으리라.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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