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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헌재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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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여당이 미국 4대 개혁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을 띄우고 있다. 열린우리당 김부겸 의원이 "대공황 때 루스벨트 대통령의 따뜻한 위로와 호소에 귀 기울이며 미 국민이 고난을 이겨냈다"고 한 게 한 예다. 그러나 실제로 미 국민이 모두 우호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특히 연방 대법원이 그랬다.

대공황 복판인 1933년 당선된 민주당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기회복을 위해 뉴딜정책에 힘을 쏟았다. 그중 핵심이 농업조정법(AAA)과 국가부흥청(NRA) 신설이다. AAA는 농산물 과잉생산에 따른 가격폭락을 막기 위해 경지를 줄이면 손해를 정부가 보상하는 제도다. NRA는 부흥청 정책에 참여하는 기업의 제품에 마크를 찍고 국민이 이를 사도록 한 것이었다.

'정부 보조금으로 경제를 살린다'는 신개념은 국민의 환영과 달리 대법원의 뭇매를 맞았다. 34~36년 대법원은 NRA.AAA를 포함, 모두 16개의 뉴딜 관련법에 5대 4로 위헌 도장을 찍었다. 그렇다고 루스벨트가 반발하기엔 상황이 나빴다. 우선 경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국민 불만을 업고 보수파들은 "뉴딜정책은 반미국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이라 공격했고, 좌익 개혁파도 "친기업적이며 보수적"이라고 화살을 날렸다. 루스벨트가 사법 개혁 도전장을 던진 때는 재임에 성공한 뒤인 37년이다. 도전장의 이름은 '법원 충전법'. 늙고 보수적인 판사의 힘을 빼기 위해 대법원 판사 수를 9명에서 15명으로 늘리고, 10년 이상 됐거나 70세를 넘는 판사들의 권한을 줄이는 게 골자다.

그런데 이 때문에 민주당이 갈라졌다. 나이가 많거나, 법원을 존중하는 정치인들의 마음이 상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독재자"란 말까지 나왔다. 논쟁 때문에 의회도 마비됐다. 민주당은 38년 중간선거에서 패해 대가를 치렀다.

사태는 엉뚱하게 해결됐다. 먼저 비판 여론을 의식한 대법관 중 두 명이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 뉴딜 법들이 6대 3으로 합헌이 됐다. 또 원로 법관이 사망하거나 물러난 자리를 개혁파가 채워 굳이 사법부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됐다.

이런 사례는 '수도 이전 위헌' 결정에 칼을 갈며 헌법재판소 개혁을 벼르는 여권에 시사점을 준다. 무리하게 서두르기보다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야 보복한다는 인상도 없애고 정치적 반발도 안 나온다.

안성규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