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울다 웃다 80年] 2. 어머니, 용서하세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고서 나는 유랑극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고향 춘천을 떠났다. 사진은 내가 출연했던 영화의 한 장면.

춘천 봉의산 아래에 있던 집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배우를 시켜주겠다…." 단장이 했던 말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당시 어머니는 동네에서 담배를 팔았다. 조그만 시골 마을이라 한 집씩 돌아가며 담배를 팔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담배 판 돈을 항상 치마 속의 염낭(허리춤에 차는 돈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집에 도착해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가위를 찾았다. 그리고 살금살금 어머니 곁으로 기어갔다. 치마를 들추자 두툼한 염낭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싹둑'. 염낭의 끈은 단번에 잘렸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오직 '이 돈만 있으면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생각만 머리를 꽉 채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헐레벌떡 여관에 도착했다. "돈을 가져 왔나?" 나는 염낭을 내밀었다. 멀찌감치 서 있던 단원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얼마야?" "여관비는 돼?" 돈은 상당한 액수였다. 단원들은 "꽤 많은데-. 두어 군데서 왕창 망해도 견딜만한 돈이야"라며 수군수군했다. 그런 단원들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내가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저녁이 됐다. 단원들은 짐을 쌌다. 나는 트럭 짐칸에 올랐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말 그대로 떠돌이 유랑극단이었다. 행선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배우만 되면 그 뿐이었다. 트럭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포장 자갈길 위로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 올랐다.

그 사이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젊을 적부터 독수공방 신세였다. 분명 과부가 아닌데도 말이다. 읍내에 소실을 둔 아버지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손은 관솔 박힌 소나무처럼 굵었다. 이마의 주름도 남달리 깊었다. 들일을 많이 한 탓이었다. 품앗이를 나갔다가 당신 몫의 점심을 몰래 수건에 싸 오기도 했다. "난 들에서 배불리 먹었다. 너희나 많이 먹어라." 그렇게 우리 형제의 끼니를 챙기시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의 가슴에 나는 못을 박았다. 잠에서 깨어나 감쪽같이 사라진 염낭을 보고서 어머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스무 살 아들이 유랑극단을 쫓아 집을 나간 걸 안다면 얼마나 가슴을 칠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다른 단원들의 눈에 띌까봐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어머니, 불효 자식을 용서하세요.' 속으로 수십 번씩 되뇌었다.

트럭 뒤편으로 초저녁 별이 하나 둘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어머니, 꼭 성공해서 돌아올게요. 꼭 배우가 돼서 돌아올게요.' 트럭 곁으로 미루나무 가로수가 휙휙 지나갔다. 언덕 너머 고향 춘천도 덩달아 멀어져 갔다.

나의 배우 인생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이 때부터 나는 '배창순'이 아니라 '배삼룡'으로 살았다. 잡일과 잔심부름으로 얼룩진 숱한 설움과 애환의 나날이 그 이름에 묻어 있다. 그래서 지금도 배.삼.룡 이란 이름 석 자가 본명보다 좋다.

배삼룡 <코미디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