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제1부 - 전쟁 60년, 전후세대의 155마일 기행 ② 백령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DMZ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병사들은 야간 경계 근무에 들어간다. 2009년 11월 19일 저녁 무렵 해병대 병사들이 백령도 서북쪽 해안 철책 근무에 투입되고 있다.

남한에서 갈 수 있는 최북서쪽의 섬 백령도. 역사적으로 오랜 유배지의 땅이었고, 중국을 오가는 뱃사람들의 땅이었고, 서구 침략의 한 경유지이기도 했다. 전쟁 중에는 동키부대와 같은 유격대가 탄생했고 해병대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해전이 일어나고 포성 소리가 오가는 긴장의 땅이다.

6·25 땐 치열한 전장이었고
지금도 해전이 벌어지는 섬

설핏 잠이 들었다. 잠이 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파고였다. 잠결에 여인의 흐느낌 같은 소리를 들은 듯했다. 어린아이의 칭얼거림 같기도 하고 노인의 길쌈 소리 같기도 했다. 눈을 뜨면 소복을 입은 여인의 뒤태가, 길쌈하는 노인네의 웅크린 등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백령도는 여인의 섬이 아니다. 백령도는 지극히 남성적인 섬이다. 두무진의 기암괴석은 힘이 넘치면서 장대하고, 섬을 휘감고 도는 물살은 포악하기까지 하니 백령도는 그야말로 남성적인 섬이다. 그런데도 나는 백령도로 가는 배 안에서 여인들의 환영을 꿈결인 듯 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중순, 배는 용기포 부두에 다다랐다. 흰 새의 날개를 닮았다 하여 백령의 이름을 가졌으니 용기포는 수면을 차고 오르는 새의 발에 해당한다.

용기포 부두를 뒤로하고 심청각으로 향했다. 북쪽 땅과는 불과 17㎞. 북쪽의 해안포가 배치되어 있다는 동굴진지는 육안으로도 가늠할 수 있었다. 남쪽의 벌컨포와 레이더가 그쪽을 향해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서로의 총구가 교차하는 바다 한가운데 허상의 선이 있다.

철조망도 없고 초소가 딸려 있는 건 아니지만 첨예한 대립과 극도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선이다. 북방한계선(NLL)이 저 선이고, 북쪽이 주장하는 해상경계선이 저보다 한참 남쪽에 위치하니 일촉즉발의 상황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 선을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건 그야말로 철새들과 중국 어선뿐이다. 때마침 중국 어선이 그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 서쪽으로 유유히 가고 있었다. 장산곶과 백령도 사이 바다에 인당수가 있다.

심청을 태운 남경상인의 배가 지날 때 저 바다는 어룡이 싸우는 듯 벽력이 일어난 듯 들끓었다지. 뱃전을 잡고 기절하여 엎드린 심청을 뱃사람들이 둥둥 북을 울리며 재촉했다지. 심청은 그래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한 점 낙화가 되었다지. 무정한 뱃사람들은 술 한 잔씩 담배 한 대씩 먹고 그곳을 떠났다지. 흰 소복이 펄럭이기라도 한 듯 눈앞이 뿌예지는 기분이었다.

백령도 북쪽 바다에 인당수가 있다면 남쪽 바다에는 연봉바위가 있다.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위에서 보면 연꽃 모양 같다고 해서 연봉바위라 부른다. 여기 사람들은 연봉바위가 심청을 태운 연꽃이 상륙한 곳이라 믿고 있었다.

저 너머가 내가 태어난 장연
칠순 할머니의 60년 망향가

백령도에 꽃처럼 닿은 사람들은 전설 속의 심청만은 아니었다.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이 상륙한 이후 1·4 후퇴로 서울이 함락될 때도 백령도는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니 황해도를 비롯한 서쪽 지역의 피란민들이 백령도 일대로 모여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자라 일곱 살 때 백령도로 흘러든 이순녀(70·사진) 할머니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소녀는 일가친척들과 함께 배를 탔다. 부모님은 고향 땅에 남았다. 포성이 울리고 불꽃이 번쩍이는 동안에도 두려움보다는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혼령기가 된 소녀는 고향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대청도·연평도·인천으로 떠돌다가 결국 고향땅이 지척으로 보이는 백령도에 정착했다. 그 소녀가 지금은 칠순의 할머니가 되었다. 그나마 고향의 기억을 공유하던 할아버지는 몸져 누웠고 육지로 떠난 자식들은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하루 아홉 시간 공공근로사업에 나가서 받는 돈이 수입의 전부. 병들고 고된 삶이지만 끝끝내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건 죽기 전에 고향땅 한번 밟아 보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이 할머니는 연봉바위가 바라다 보이는 전망대 근처에서 해당화를 심고 있었다. 찬 돌바닥에 주저앉아 자꾸만 먼 바다로 시선을 돌리던 할머니의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곳이 고향 땅에서 젤로 가까운 걸, 안 그나? 저 너머가 바로 내가 태어난 장연이다, 아나?”

얼결에 잡은 그녀의 손은 그녀의 삶처럼 거칠고 뻣뻣했다.

전쟁 당시 백령도는 몰려든 피란민들로 포화상태였고 일대 혼란을 이루었다. 피란민 중 청년들의 대다수는 유격대나 해병에 자원했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빨리 전쟁을 끝내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격대가 일명 동키부대다. 동키부대는 억세고 충실하며 참을성 있고 싸움을 잘하는 당나귀의 천성과 연결시킨 미군의 명명이었다.

동키부대는 한국전쟁 기간 중 3만2000여 명의 대원이 참전해 백령도는 물론이고 서해 연안도서를 책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동키부대는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로 명명된 것인 데다 참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던 동키부대원들은 국가 유공자로 선발되지 못했다. 백령도 진촌리 일대에는 레오파드 기지 예하의 동키부대가 사용했던 막사와 우물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여전히 전쟁 중인 분단의 바다
모든 섬들이 조용히 떠 있다

진촌에서 만난 서병순(78) 할아버지는 해병대에 입대해 두 달 훈련 만에 서부전선으로 투입되어 열흘도 못 되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뭔가 뜨거운 게 쑥 빠져나가는 것 같았지, 몸에 박힌 게 파편인 줄이나 알았나.”

할아버지는 부상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 내며 허리에 남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함께 해병대에 입대했던 여남은 명의 동네 청년들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둘뿐이었다니 부상은 당했지만 살아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었다.

백령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거나 고향을 지척에 두고 싶은 실향민이다. 혹은 도시를 헤매고 헤매다 섬으로 숨어든 이들도 있었다. 섬은 어쩌면 그 자체가 긴장인지도 모른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모든 섬들은 조용히 긴장을 유지하며 떠 있다. 백령도는 그야말로 긴장의 섬이다.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긴장 그 자체다. 지금 백령도를 긴장케 하는 것은 여전히 전시 중인 한반도의 분단 상황일 것이다.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하는 길, 뱃길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천운영 소설가

◆소설가 천운영=연재를 맡은 소설가 천운영(39·사진)씨는 문신사(文身師)의 세계를 다룬 단편 ‘바늘’로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꼼꼼한 취재와 탄탄한 글쓰기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는다. 소설집 『명랑』 『그녀의 눈물 사용법』, 장편소설 『잘가라, 서커스』 등을 냈다. 현재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소재로 한 장편 ‘생강’을 창비의 문학 블로그 ‘창문(blog.changbi.com/lit)’에 연재 중이다. 1971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특별취재팀=취재 신준봉 기자,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이병구 기자
취재=협조 국방부·육군본부 해병대 사령부

백령도는 인천보다 평양 가까운 서해 최북단 섬

인천시 옹진군 백령도는 북위 37도 52분에 위치한 서해 최북단의 섬이다. 인천에서보다 평양에서 더 가깝다. 북한 땅 장산곶까지 17㎞, 장산곶 앞바다의 월내도까지는 불과 13㎞ 거리다. 취재진이 백령도를 찾은 것은 대청해전 발생 9일째인 지난해 11월 18일이었다. 백령도에 주둔 중인 해병대 관계자는 “남한에서 국지전이 발생한다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라고 말한다.

6·25 때만 해도 백령도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인민군 1개 대대가 서쪽 연화리 해안으로 상륙해 섬을 장악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철수한 뒤 내내 국군이 점령했다. 양측 간 교전도 없었다. 백령도가 전략적으로 급부상한 것은 1973년 북한이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을 부정하면서부터다.

NLL은 53년 8월 31일 유엔군이 아군 함정·항공기 등의 북방 활동 한계로 삼기 위해 설정했다. 수십 년간 유지되며 국제법상 유효한 남북한 간 해상경계선 역할을 해왔다. 일종의 영토 개념이다. 그러나 북한은 제1 연평해전(99년)과 제2 연평해전(2002년) 등을 일으켜 NLL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NLL의 턱밑에 위치해 있는 만큼 긴장도가 클 수밖에 없다. 주민 수는 5000명. 주민의 60%가 농업에 종사하고 어업 인구는 6% 정도다. 남한에서 여덟째로 큰 섬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