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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6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60. 로드쇼와 10 ·26사태

돌이켜보면 1980년 초 도입한 복수통화 바스켓 방식의 변동환율제가 그랬듯이 모든 제도는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다. 한때 장점으로 보이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 단점이 될 수 있다. 거구가 된 맘모스가 결국 자신의 몸뚱아리를 감당하지 못해 멸종했듯이.

70년대 단기 외화 차입수단을 개발한 것도 당시엔 좋은 성과로 통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외환위기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1차 오일 쇼크 때 내가 뼈저리게 느낀 점은 단기 외화 차입의 수단도 개발돼 있지 않았지만 외국 금융인들과의 유대가 긴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외환정책을 세우고 집행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금융인.투자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필요할 때 돈을 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갑자기 비를 만났을 때 평소 거래관계가 없었던 상점에 들어가 우산을 빌려달라고 해 봤자 거절당하기 십상이다. 하다 못해 우산 하나도 평소 거래를 하고 친분도 두터운 사이라야 쉽게 빌릴 수 있다.

내 방을 외국의 금융인.투자가들에게 개방하고 외국계 금융기관이나 외국기업들에 외환통계를 공개한 것도 평소 신뢰관계를 쌓기 위해서였다. 외환보유액이 3급 비밀이고, 언론사가 외환 사정이 안 좋다고 보도하면 '국익을 손상시켰다' 고 매도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나는 정부에 몸담고 있으면서 은행가처럼 행동한다고 외국계 은행 사람들 사이에서 정부내 금융가(government merchant banker)라고 불렸다. 이런 평판을 얻은 계기가 된 것이 런던 근무였다. 나는 또 외국에 나가 현지의 금융인.기업인들을 상대로 한국경제설명회를 열어 "한국 경제가 좋고 전망도 밝다" 고 홍보했다. 79년 가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피살당한 10.26 사건 당시 나는 뉴욕에 있었다.

재무부 국제금융차관보로 있던 나는 남덕우(南悳祐) 대통령경제특별보좌관(전 총리), 정훈목(鄭勳沐) 국제경제연구원 연구위원(전 현대건설 회장) 등과 함께 뉴욕.시카고.샌프란시스코.LA 등 미국의 주요 도시를 돌며 한국경제설명회 로드쇼를 열고 있었다.

당시 부마사태 등으로 국내 정정은 불안했다. 우리는 "한국은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돼 있어 한국에 대한 투자 전망은 밝다" 고 강조했다. 지금도 그 때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영도력 하에…" 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로드쇼 후 南 전 총리는 하와이로 떠나고 鄭 박사는 곧바로 귀국했지만 나는 워싱턴의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 들르기 위해 뉴욕에 홀로 남았다.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다음 날 골프 약속을 앞두고 한 인도인이 운영하는 다운타운의 골프용품 가게에 들렀다. 싱글 골퍼였던 포천지 국제 에디터가 자신이 회원으로 있던 뉴욕 교외의 미국내 10대 골프장 윙드푸트로 나를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강행군 끝의 모처럼의 휴식.

'내일 아침이면 그가 보낸 리무진이 나를 태우러 오리라. '

갑자기 점포 안의 라디오에서 한국 관계 뉴스가 흘러나왔다. "사우스 코리아…쿠데타…朴대통령…축출…. "

아나운서는 朴대통령의 실각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온 나는 뉴스 전문 라디오 방송 텐텐(10.10)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 뉴스는 분명히 절대권력이었던 朴대통령의 서거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약속을 취소하고 곧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도 '국제수지가 또 문제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뿐 아니라 당시 미국에 가 있던 모든 공직자들이 서둘러 귀국했다. 그들의 비장한 얼굴에서 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이 이 위기를 극복하고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된 후 꼭 다시 가서 그 사실을 알리겠노라고 마음먹었다. 1년 후 나는 정말 다시 뉴욕에 있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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