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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김중수의 한은, 독립성 새삼 화두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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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2008년 3월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총재가 공석이 된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일본 참의원이 당시 후쿠다 야스오(福田庚夫) 총리가 지명한 무토 도시로(武藤敏郞) 차기 일본은행 내정자에 대한 임명 동의안을 부결시켰기 때문이다. 여당인 자민당이 제출한 총재 임명 동의안이 의회에서 부결된 것은 처음이었다.

야당이 무토 후보를 거부한 것은 그가 재무성(한국의 기획재정부 격) 차관을 지낸 관료 출신이라는 이유에서다. 무토가 일은 총재가 되면 재정과 금융이 분리되지 않으면서 일은의 독립성 확보가 어려워진다고 본 것이다.

결국 자민당은 야당의 반대에 굴복해 일은 출신인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부총재를 총재로 지명해 의회의 동의를 받았다.

일본만 해도 중앙은행이 정부에 휘둘리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의회는 일은 독립성을 위해 재무성(정부) 출신 인사의 인준을 거부했다. 당시 다른 법안들과의 흥정 차원에서 비토권을 행사한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좋은 명분이 됐다.

김중수 주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가 한국은행 총재로 내정되면서 국내에서도 중앙은행 독립이 화두가 됐다. 김 내정자에게는 여러 과제가 놓여 있지만 시장에서는 특히 그가 한은의 독립을 지켜낼지를 눈여겨보고 있다. 그는 내정되기 전부터 “한은도 정부”라고 말했다. 한은의 독립성을 두고 “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이지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은 아니다”라고도 했다. 벌써 통화신용정책과 관련해 “정부의 입김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중앙은행은 본질적으로 정부와는 각을 세우는 조직이다. 중앙은행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이 처음 설립된 것은 1694년이었다. 100% 자본가들이 설립했다. 하지만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을 민간 소유로 두는 게 맞느냐는 역사적인 논쟁을 거친 뒤 1945년 노동당 정부가 영국은행을 국유화했다. 그러나 정부 조직은 아니었다. 임기가 제한된 정권이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을 휘두르는 것을 막는 게 필요했다. 그래서 중앙은행을 법률에서 보장하는 독립된 특별기구로 만들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1907년 금융공황, 1920년대 후반 대공황을 거치면서 돈의 가치를 안정시키고 서민을 보호하기 위한 독립된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이런 과정을 거쳐 독립성을 챙긴 것이다.

한국에서도 중앙은행은 법적으로는 독립된 기관이다. 한은은 1950년 6월 12일 법률 제138호 ‘한국은행법’에 의해 설립됐다. 한은법 1조는 ‘물가 안정을 통해 국민경제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한은은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런 설립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평을 들어왔다. 경제 부처는 물가 안정보다는 경제 성장을 우선시한다. 한은과 늘 대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한은은 스스로 독립을 지키지 못했다. 97년 말 한은법이 개정될 때까지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경제 성장을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재무부가 한은을 장악했다. 재무부 장관이 한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92년에는 정부의 지시로 투신사에 2조9000억원의 특별융자를 하는 등 한은은 정부의 금고 역할을 하기도 했다.

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한은법이 개정돼 한은은 독립의 기틀을 다졌다. 은행감독권을 떼주는 대신 금통위 의장을 한은 총재가 맡게 됐다. 하지만 한은의 독립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단 총재를 비롯한 금융통화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국회 동의를 받는 절차도 없다.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반드시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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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를 정하는 금통위원의 임기도 4년으로 짧다. 정부의 코드에 맞는 인물을 기용하기 쉬운 구조다. 미국 연준 이사의 임기는 14년이다. 임기 만료도 순차적으로 다르다. 2년마다 한 명씩 이사를 교체하는 구조다.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연임을 해 8년간 집권하더라도 연준 이사는 절반 밖에 교체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국제통화기금(IMF)이 2007년 발표한 중앙은행 자율성 지수 평가 결과, 한국은 0.56(유럽중앙은행=1)으로 주요 선진국 중 일본(0.44) 다음으로 하위권이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상무는 “김 내정자는 한은의 독립정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정부와는 적절히 협조하며 물가 안정과 성장을 추구하는 책무를 가졌다”고 말했다.

김종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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