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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준화교육 4반세기] 9·끝 결산 전문가 좌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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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3월 26일자부터 게재한 중앙일보의 '심층 점검-평준화 교육 4반세기' 시리즈에 학생.학부모.교사 등 교육 주체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인터넷 토론방과 e-메일.전화를 통해 연일 다양한 의견이 접수됐다. 획일화를 강요하는 교육시스템에 대한 비판론, 고교 평준화로 중학교의 조기 입시 과열은 잡았다는 긍정론, 21세기에 알맞게 시급히 보완해야 한다는 개선론이 쏟아졌다.

이에 취재팀은 고교 평준화 조치의 보완책을 모색하기 위한 전문가 좌담회를 마련했다. 좌담회는 지난 10일 오후 5시부터 세 시간 동안 열렸다.

*** 획일화 탈출 급하다

▶황인표=평준화 점검 시리즈에 교사들의 공감이 컸습니다. 사립고의 장년층 교사들은 비평준화 시대에 대한 향수가 상당합니다. 꼭 상위권이 아니더라도 수준이 비슷한 학생을 모아놓고 가르치고 싶다는 거죠.

수업 분위기도 중앙일보 보도 그대로입니다. 수업시간에 학생의 절반 이상이 자는 교실이 대다수입니다. 저는 이른바 '교실 붕괴' 의 주원인이 평준화라고 생각합니다. 0에서 1백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학생들을 50에 맞춰 가르치니 잘하는 학생도 못하는 학생도 모두가 무력감을 느낍니다. 사회는 대중화.대량생산 시대에서 전문화.다품종 소량생산 시대로 이행하고 있는데 교육에는 특성화.개인차 교육이 전혀 없는 실정입니다.

▶이영만=제도로서의 평준화는 공과(功過)를 모두 지닌 게 사실입니다. 1974년 시작 당시에는 고입 재수생 양산을 막고 고교간 격차를 해소, 중학교육을 정상화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을 제한하고 애교심이 희박해지는 등의 문제점도 있습니다만, 교실 붕괴나 학력 저하의 원인을 평준화로만 돌리기는 힘듭니다.

▶김흥주=평준화가 중학생의 입시 부담을 덜고 고교교육의 기회를 확대한 것은 맞습니다. 평준화지역과 비평준화지역의 대학 진학률을 비교해 봐도 평준화 때문에 학력이 저하됐다고 단언하기는 힘듭니다.

본래 평준화는 교육 여건의 평등을 의도한 것인데 학력의 평등화로 잘못 이해돼 왔습니다. 평준화의 대안이 동질집단 편성만은 아닙니다. 사회에 나가 이질집단과 어울리려면 학생들을 항상 동질집단으로 묶을 수만은 없습니다. 평준화제도 내에서 학생들의 능력을 다양하게 살려줄 수업 전략과 학습 방법의 도입이 시급합니다.

▶김대유=교사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농담으로 '타임머신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기분' 이라고 합니다. 학생들은 달라졌는데 학교는 예전과 같이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교과서만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수업시간도 주당 34시간으로 과중합니다. 이런 교육과정으로는 교사들이 중간층이 아니라 상위 5~10%에 초점을 맞춰 수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어.수학은 물론이고 한문.미술.체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과 과정부터 현실성있게 바꿔야 합니다.

*** 수준별 교육 이렇게

▶황인표=수준별 교육이 아마도 교육부가 내놓은 대안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건은 이를 시행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우선 '수준' 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 명확한 지침이 없습니다.

한 반에 20~30명이면 몰라도 40~50명이나 되고 한 학년에 4백~5백명인 학생들의 수준을 달리 파악할 도리가 없으니 자연히 학기 초 시험성적으로 나눕니다. 우열반이 돼버리는 거죠. 과목별로 나누는 건 그나마 다행입니다. 심지어 국어.영어.수학 세 과목 성적만으로 우열반을 나누는 학교도 있습니다.

▶김흥주=외국은 학업성적을 기준으로 강제로 분반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학업 성취도와 분반상황을 알려주고 선택하도록 합니다. 모두가 A반을 원한다면 A반만으로도 운영하는 융통성이 필요합니다.

▶김대유=수준별 교육이 우열반이 안되게 하려면 현재의 평가시스템을 완전히 개선해야 합니다. 학생들 수준에 맞춘다면 국어는 수.우.미.양.가 다섯 단계로, 영어는 A.B 두 단계로도 평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처럼 모든 과목의 총점을 합산하고 백분율로 석차를 내 대입 내신 판정형식에 맞추라는 식으로는 수준별 교육이 안됩니다.

▶황인표=요즘 학생들에게는 공부를 통해 성공한 모델이 드문 것도 문제입니다. 대학 나온 사람보다 연예인이나 프로야구 선수가 돈을 더 많이 버는 세상입니다. 공부를 잘한다고 다른 학생의 부러움은 커녕 오히려 따돌림을 당하는 풍토입니다. 교과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학생들의 성취도를 평가하면서 학업 의욕을 북돋워야 합니다.

▶김대유=학생들의 특기와 적성을 교과목에 국한해서는 안됩니다. 7차 교육과정이 고교생들에게 제시한 선택과목은 미분과 적분, 법과 사회, 문법 등인데 K고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학생들의 희망과목은 요리.발레.만화 등이었습니다. 프랑스 학교처럼 오전에는 교과수업, 오후에는 특기수업을 하는 식으로 비교과 특기.적성교육을 확대해야 합니다.

*** 시설개선 서둘러야

▶김대유=교실에 멀티미디어 설비만 갖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예컨대 영어시간의 절반을 강의식으로 하고, 나머지 절반은 교실 내 멀티미디어 자료를 검색해 조별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다양한 수업방법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이영만=교육부의 선진국형 학교 구상도 그런 것입니다. 멀티미디어 교실과 체육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춰 영어든 애니메이션이든 수영이든 저마다 하고 싶은 특기 공부를 실현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자립형 사립고 도입도 학교형태를 다양화해 학부모의 학교선택권을 지속적으로 높이려는 계획입니다.

▶김흥주=학교형태를 다양화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한 학교 내에서도 다양한 진로 프로그램이 가능하도록 해야 합니다. 멀티미디어 세대에게 칠판만 보라고 하니 흥미를 잃는 것은 당연합니다.

▶황인표=공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신이 과외를 부릅니다. 학교에서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을 폐지해도 '학원에 보내야 안심이 된다' 는 학부모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김대유=과외가 불가능하도록 교육과정과 평가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현재 학원들을 먹여살리는 학교 교과의 미리 배우기가 가능한 것은 전국 어느 중.고교든 똑같은 진도로 영어.수학을 배우고 엇비슷한 문제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중학교 사회시험은 문제의 절반 정도를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해당지역에 관한 것으로 출제합니다. 획일화된 교육과정이 과외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김흥주=연 7조원에 이르는 돈이 사교육비로 새나갑니다. 이를 공교육이 흡수하도록 교육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김대유=학습부진아 지도도 지금처럼 개별교사들의 열의에 기대기보다는 기초학력 국가책임제를 도입, 제도화해야 합니다. 여당에서 논의가 있었지만 재원마련.기초학력 기준 문제로 입씨름만 하다 말았습니다. 저소득층에 대한 학비지원 문제도 기획예산처의 입장을 보면 오히려 후퇴하는 조짐입니다.

▶이영만=학교시설 개선사업은 꾸준히 지원할 예정입니다. 저소득층 대상으로 정보화를 중점 지원할 계획입니다. 초고속 통신망을 통해 사이버 과외교사를 도입하려는 것도 그 예입니다. 앞으로는 교육재정 투자에 지역간 차이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자립할 수 있는 지역은 지원액을 줄이고, 어려운 지역은 늘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교사에 힘 실어주자

▶김흥주=논의를 거듭할수록 교육개혁에 묘수란 없다는 생각입니다. 확실한 것은 교사들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사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사회적 노력이 절실합니다.

교사의 힘은 처우개선 등 물리적인 투자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존심이 강한 집단이기 때문에 이를 회복시켜 주는 접근을 통해 교사들을 교육개혁에 동참시켜야 합니다.

▶황인표=교육문제는 교사에서부터 풀어야 한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이미 몇 차례나 교육부장관과 언론의 공격을 받으면서 교사들의 의욕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교사들은 요즘 어떠한 정책이 나오든 부작용부터 떠올립니다.

▶김대유=교사.학생.학부모 3자간 원활한 의사소통 구조를 만들어 정책이 교육부나 교육청이 아니라 교육현장에서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교육부는 하드웨어 개선에 주력하고 소프트웨어쪽은 교사들에게 자율성을 대폭 줘야 합니다.

요즘 교사들은 30대 후반만 돼도 교감.교장으로 승진하기 위해 학생들을 뒷전에 두고 연수 점수 따기에 매달리는 형편입니다. 평교사로서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연수나 승진제도가 절실합니다.

▶황인표=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교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는 교장.교감 등 관리자가 교사들을 감시의 대상으로 보는 것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교육부.교육청도 지시.감독보다는 지원기관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교육은 단기간에 성과를 볼 수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제발 진득하게 정책을 추진하기 바랍니다.

▶김흥주=우리 교육현장은 무책임.무성의.무신뢰의 '3무' 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학교가 성의껏 가르쳐야 학부모도 학교를 신뢰할 테지만 이는 선후를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 전반이 학교를 믿어야 합니다. 뭐 하나 잘못되면 모든 학교가 그런 것처럼 확대하는 관행을 불식해야 합니다. 이제는 정치 지도자들부터 여야를 막론하고 교육개혁 의지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교육 개혁.개선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선언하고 초당적인 교육발전위원회라도 만들어야 합니다.

▶이영만=평준화 속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란 생각입니다. 교육부는 교육여건을 개선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이에 앞서 교사들의 자발적인 도움이 절실합니다.

진행=박종권.강홍준 기자

정리=이후남.구희령 기자

▶이영만 <교육부 학교정책실 학교정책기획팀장>

▶김흥주 <한국교육개발원 교육정책연구본부장>

▶김대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정책연구국장>

▶황인표 <서울 보성고 교사.한국교총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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