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6) 대구에 떨어진 포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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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을 때인 1950년 8월 중순, 대구 동북방의 가산산성으로 들어온 북한군이 대구에 포격을 했다. 민심이 흔들리자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오른쪽)이 대구 시내에서 마이크를 잡고 “대구를 사수하자”는 연설을 하고 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조병옥 박사도 시내를 다니며 대구 사수를 역설했다. [중앙포토]

내 목숨과 국군 1사단 지휘부를 노린 적군의 야습이 있기 전날인 1950년 8월 18일 새벽에 북한군은 가산산성에 들어왔다. 우리는 포 사격으로 적의 발을 묶은 다음에 증원군을 받아 산성으로 올려 보내 적을 쫓아낼 작정이었다.

북한군은 가산산성으로 진출하면서 대구를 향해 박격포를 쐈다. 적이 집중적으로 겨냥한 곳은 대구역이었다. 82㎜ 박격포 7발을 발사해 대구역에서 근무 중이었던 직원 한 명이 순직하고 민간인 7명이 부상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정부가 대구에서 부산으로 전시(戰時) 수도를 다시 옮기는 날이었다. 대구에 떨어진 적군의 포탄 7발은 이상하리만큼 거대한 파급효과를 낳고 말았다. 소문이 소문을 만들고, 다시 큰 소문으로 끝없이 번져가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대구도 곧 적의 손에 끝장나고, 대한민국은 이제 갈 곳이 없다’는 식의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난무했다. 이런 상황을 나는 육본으로부터 전화를 통해 듣고 있었다.

전선 상황이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동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국군과 미군의 분전으로 전선은 잘 지켜지고 있었고, 미군의 막대한 지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오는 소식은 암담했다. 대구에서 심리적인 공황(恐慌) 상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대구는 30여만 명의 원래 인구에다가 대거 몰려든 피란민을 보태 70여만 명이 살고 있었다.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대구 주민과 피란 왔던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 나왔다. 남자는 지고 여자는 머리에 짐을 인, 남부여대(男負女戴)의 상황이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부산 등 남쪽 지역으로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섰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대구역이나 남쪽으로 향하는 국도 쪽으로 몰려들었다. 적의 포탄 몇 발로 우리 스스로 무너지는 꼴이 벌어질지도 모를 순간이었다.

고 조병옥(1894~1960)

그때 조병옥 박사가 대구역에 나타났다. 광복(光復) 뒤에 미 군정(軍政) 기간 동안 경무부장을 맡았고 신생 대한민국에서 내무장관으로 줄곧 경찰을 총지휘해온 분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미국에 유학해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셈이다. 늘 위엄(威嚴)이 넘쳤고, 경찰의 지휘계통을 완전히 장악해 해방 뒤의 혼란기와 전쟁을 맞은 대한민국의 치안을 유지했다.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그가 직접 대구역의 피란민 대열 앞에 나선 것이다. 그는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려는 피란민들을 향해 일장연설을 했다.

“우리가 누굴 믿고 살겠냐. 국군과 미군을 믿자.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국군의 분투를 더 기다려 보자.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는다. 좀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강력한 그의 카리스마가 빛을 뿜었다. 조 박사는 대구 역의 연설에 그치지 않고 몸소 거리를 누볐다. 가두(街頭)에서 그는 피란민들을 향해 계속 “국군과 미군을 믿고 더 기다려야 한다”며 설득을 벌였다.

해방 뒤의 한국 사회는 이념적으로 좌우가 충돌하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다. 조 박사는 그 혼란기 속의 치안을 담당했던 최고의 주역이었다. 당시 경찰은 미 군정 아래에서 ‘법과 질서(Law and rule)’의 원칙을 확립했다. 미군은 경찰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국군보다는 경찰을 더 후원했다. 미 군정 아래에서 경찰은 카빈과 M-1 소총으로 무장한 반면, 군대는 일본이 남긴 38·99식 소총을 들었다. 기관총도 경찰에게만 줬지, 군의 몫은 없었다. 초기 병력 수준에서 보면 경찰이 군에 비해 몇 수 위였다.

그런 막강한 조직을 이끌고 해방 뒤, 건국 초의 혼란기를 잘 헤쳐 왔던 분이라 조 박사의 대구 공황 상태 진정 노력은 금세 효과를 나타냈다. 경찰이 전면에 나서 대구의 민심을 가라앉혔다. 조 박사는 경찰 병력을 직접 진두(陣頭)에서 지휘하면서 피란민과 대구 시민들을 계속 설득했다. 게다가 미 8군 사령부가 대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점도 대구의 시민과 피란민들의 불안정한 심리를 끌어 앉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거리로 몰려 나왔던 피란민들이 다시 제 거주지로 돌아갔고, 혼잡했던 길거리도 점차 질서를 잡아갔다.

진실(眞實)이 자리를 잡으면 소문은 그저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거듭되는 적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국군과 미군은 튼튼하면서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방어막을 펼치고 있었다. 적군이 오히려 조급한 심리에서 발악적인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이게 진실이다. 엄연한 이 사실 앞에서 공황을 부르는 헛소문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뒤에도 적군의 포탄이 대구에 또 떨어졌다. 19일과 20일에도 적의 포탄 몇 발이 대구에 날아 들었다. 그러나 피란민은 더 이상 거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구역에 짐을 이고 진 남녀들이 더 이상 출현하지 않았다.

후방이 튼튼해야 전선에서 힘을 낼 수 있다. 나는 대구가 안정을 찾고 있다는 말에 큰 위안을 받았다. 내 앞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는 데 힘과 신경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군 증원군이 다시 왔다. 그 지휘관이 엉뚱하게도 내게 중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니 후이 숴중궈화마(你會說中國話嗎: 중국말을 하느냐)?” 미군의 입에서 나온 중국말을 듣자니 참 신기했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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