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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짧고 예술은 길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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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호 35면

문화예술위원회에 두 위원장이 동시에 출근하는, 보기 민망한 사태가 한 달 넘게 계속된다. 둘은 벗인가, 적인가? 아무튼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찾아왔다. 공자는 군자 3락(樂) 중 하나를 ‘벗이 먼 곳에서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공자의 ‘붕(朋: 벗)’은 반드시 ‘좋아하는 벗’만을 일컫는 건 아닐 게다. 공자의 말은 싫어하는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까지도 반갑게 맞으라는 역설적 표현일 수 있다. ‘먼 곳’이라는 표현에 담긴, 불편하고 껄끄러운 외연의 차이를 넘어서 마음과 마음이 통할 때 소중하고 값진 것이 생성되지 않을까.

다른 것끼리 통할 때 얻어지는 최고의 선물은 새 생명이다. 다른 것의 극단적인 형태를 암수라고 한다면, 그 상이한 것들이 만났을 때야 비로소 새 생명이 탄생한다. 우주를 떨게 하는 기쁨의 순간이다. 동성애 커플은 제아무리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다 해도 당대로 끝날 뿐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 자기복제는 더욱 궁색하다. 복제 결과로 태어난 유사 생명은 기쁨보다는 불안과 우려를 더 일으킨다.

문화예술에서 창의적인 것이란 곧 다름을 의미한다. 상이한 것과의 결합은 창조의 필수조건이다. 특히 근간에는 이종 간의 교배가 활력 있는 문화적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양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현대미술과 영화의 결합이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국악과 전자음악이 손쉽게 만나고, 발레리나와 비보이가 한 무대에서 춤을 춘다. 연극과 첨단 영상, 건축과 음악, 영화와 게임, 심지어 요리와 퍼포먼스가 만나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시대다. 장르 간 경계,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의 차이, 문화나 이데올로기의 벽은 이제 크로스 오버로 무너지는 세상이 됐다.

그런데 이런 통섭의 시대를 우리의 문화예술계는 사뭇 역행하는 듯하다. 칸막이를 치고 딱지를 붙이는 영토싸움이 여전하다. 각자의 시간적·공간적 경험이 다르기에 세계관의 차이는 너무도 당연한데,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섬에서 발견한 것은 성(性) 선택에 의해 보장되는 다양성과 자연선택이 부여하는 적응력이 진화의 두 축이라는 사실이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들은 각자 개발한 적응력을 동원해 생명을 유지한다. 적응력이 떨어져 도태의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그들은 자발적으로 ‘변이’를 일으켜 존속력을 키운다. ‘변이를 수반한 번식’이 생태계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태환경을 인위적으로 바꾸면 자연법칙에 거스르는 변종이 발생한다. 사회도, 문화예술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난 시대에 예술정신이 이데올로기적 선별성에 의해 얼마나 피폐화되었는지 실감했다. 그런데 지난 시대와는 대척점에 놓인 이념 코드가 다시 예술생태계의 자연법칙을 훼손하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변종을 낳고 싶은 것인가?

‘차이의 인정’은 예술의 생명력이다. 문화예술위원회의 두 위원장 사태는 예술계를 이념적 영토로 반분하는, 위험한 현실을 나타내는 지표다. 문예부흥이 잠시 일어났던 조선 정조 때도 그랬다. 연암 박지원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선비들의 고문(古文)을 비웃었던 자유분방한 문인이었다. 그는 양반과 서얼이 함께 어울린 연암 그룹의 맏형이었는데, 당시 글깨나 한다는 사대부들이 ‘교불택인(交不擇人: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귐)’이라고 손가락질할 정도였다. 『열하일기』로 널리 알려진 박지원의 문체는 너무도 파격적인 것이어서 학문을 숭상하던 정조마저도 그의 문장과 도덕에 ‘불온’이란 낙인을 찍었다. 당시 최고의 문학적·예술적 자질을 가진 연암그룹 학자들에게 ‘창작 금고형’이 내려졌다. 이것이 문체반정이었다. 19세기 조선의 예술과 문화는 정치적 금압으로 인해 암흑기로 접어들어야 했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마침 오광수 위원장이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멋진 구절을 발견했다. 3월에 막 올린 자작시다.

웃으세요 3월이 되면
말라버린 척 / 굳어버린 척
외면했던 빛깔들을 되살리고
조용하니 생명 하나하나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셔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소박한 사랑으로 가득한 글을 보며, 오 위원장의 시심(詩心)과 그가 겪는 현실 간의 괴리가 아프게 다가왔다. 70이 넘은 백발의 노신사, 이제는 ‘멀리서 찾아온’ 친구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려 따뜻한 차 한 잔 권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는 짧고 예술은 길다. Publica brevis ars lo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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