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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기자가 만난 시장 고수] 허남권 신영자산 운용본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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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신영자산운용 허남권(47) 자산운용본부장은 국내 증시에서 워런 버핏 방식의 가치투자에 가장 충실한 펀드매니저로 꼽힌다. 그는 시장이 오르내리는 데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기업의 내재가치에 비해 주가가 싼 저평가 종목을 찾는 데만 골몰한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소리·소문 없이 조금씩 거둬들인다. 그러곤 끈기 있게 기다린다. 뒤늦게 시장이 이 종목에 흥분하면 거꾸로 조용히 나눠서 팔기 시작한다. 허 본부장은 항상 주식투자의 즐거움을 설파한다. 시장이 빠지면 저평가된 종목을 많이 살 수 있어 좋고, 오르면 사뒀던 종목을 팔아 이익을 챙길 수 있어 좋지 않으냐는 것이다. 이런 여유로움의 파워 때문일까. 그가 굴리는 ‘신영마라톤’과 ‘밸류고배당’ 펀드는 최근 7년간 260% 넘는 누적 수익률을 기록해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 상승률(150%)을 크게 앞질렀다. 이들 펀드는 국내 가치주펀드의 대명사로 떠오르며 매니어층을 두텁게 확보하고 있다.

-가치투자가 뭔가. 가치 없는 종목에 투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아프리카의 초원을 생각해보자. 얼룩말처럼 형형색색 멋진 자태를 뽐내는 동물들이 눈길을 확 끌겠지만 누가 뭐래도 최강자는 사자다. 그러나 사자는 낮잠 자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가치투자는 잠자는 사자를 찾아내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사자가 잠을 깨면 동물의 세계는 공포에 떨지 않는가.”

-종목 선정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경기변동에 상관없이 매출과 수익·현금흐름이 꾸준한 기업, 유·무형의 자산을 많이 갖고 있는 기업, 진입장벽을 확보해 시장점유율이 높은 기업, 주주 중시 마인드로 배당 성향이 높은 기업 등이다. 신세계나 롯데·남양유업 같은 종목이 대표적인데, 이들 기업이 하는 일은 과거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고 주가흐름도 매우 답답했다. 그러나 기업 가치는 결국 주가에 반영됐고 끈기 있게 기다린 사람들에게 큰 수익을 안겨줬다.”

허 본부장은 어떤 종목을 살 때는 먼저 최소한 3년 이상 믿고 기다릴 수 있을지를 따져본다. 그 일환으로 해당 기업이 과거 최악의 경영 환경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를 엄밀히 점검한다. 합격점을 받으면 분할 매수에 들어간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대중공업이다. 6~7년 전 이 회사의 주가가 2만5000~4만5000원일 때 사 모았다가 2~3년 전 10만원을 넘어 50만원에 도달할 때 나눠 팔았다.

-올 한 해는 어떤 전략으로 투자에 임하고 있나.

“지수만 봐선 투자할 때가 아니라고 본다. 재미없는 한 해가 될 것이다. 글로벌 경기의 하강과 출구전략, 재정위기 등 위험 요인이 많다. 나는 시장 전체의 과열과 침체 여부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시가총액 비율로 따진다. 한국 증시에서 이 비율은 60~100%를 오르내렸다. 지금은 85% 선으로 애매한 위치에 있다. 시장이 본격 상승 커브를 다시 그리려면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돌출 가격 조정의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기 때문에도 지금은 저평가된 주식에만 집중 투자하는 안전운행이 요구된다.”


- 해당하는 종목들은 어떤 것인가.

“중국 진출 기업들에 주목한다. 자동차·음식료·의류·유통 등 여러 업종을 망라해 중국 내수시장에서 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국내 기업들이 의외로 많다.”

-한국 경제가 길게 봐도 불안하다는 진단이 나온다. 잠재성장률이 3%대까지 떨어진 가운데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한국 경제가 만약 일본처럼 된다면 주식에 장기 투자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해선 나도 걱정이다. 10년쯤 뒤에는 일본처럼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저출산에 따른 인구 감소가 가장 큰 위협 요인이다. 부동산시장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고 기업들의 수익성도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탈출구는 있다. 똘똘한 기업들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밖으로 계속 나갈 것이다. (주식 투자를 통해) 거기에 올라타는 게 최선의 선택이다. 예를 들어 주방용품 제조업체인 ‘락앤락’을 보자. 국내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중국에 진출해 전체 매출의 35%를 거기서 올리고 있다.”

허 본부장은 이 대목에서도 가치투자의 효력을 강조했다. 저평가라는 안목으로 고른 가치주들은 증시가 장기 침체에 들어가도 가격이 상대적으로 덜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격이 더 떨어진 다른 자산으로 옮겨 타기가 훨씬 수월하고, 보다 큰 재기의 기회를 갖게 된다는 설명이다.

-신영마라톤펀드가 놀라운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판매 잔액이 1조7000억원 정도로 생각만큼 많이 팔리지는 않았는데.

“이 펀드를 8년 전 만들 때 설정한 목표 수익률이 연 15%, 복리로 5년 100%였다. 큰 욕심 없이 길게 투자하는 고객을 겨냥했다. 그래서 펀드 수수료도 연 1.55%로 다른 운용사의 주식형 펀드들보다 1%포인트나 낮게 정했다. 이처럼 수수료가 낮다 보니 은행 등 판매사들이 펀드를 소극적으로 팔고 있는 것 같다. 다행히 최근 입소문이 나면서 판매액이 꾸준히 늘고 있다.”

-허 본부장은 14년째 신영자산운용에서 일해 왔다. 고연봉의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나.

“있었지만 거절했다. 연봉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금을 떼고 나면 큰 차이도 없다. 중요한 것은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기업문화다. 회사는 나에게 충분한 권한과 책임을 줬고, 일시적으로 수익이 나빠도 믿고 기다려줬다.”

-펀드매니저로 스트레스도 클 텐데.

“왜 없겠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투자의 세계다. 힘들 때일수록 남들과 달리 생각하는 역발상에 주력한다. 남들이 기뻐할 때 하차할 준비를 하고 두려워할 때 올라탈 생각을 한다. 되돌아 보면 시장이 악재투성이였을 때 투자해서 실패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악재를 즐길 정도다. ”

글=김광기 선임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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