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서 애증까지:고수석의 북·중 돋보기] ⑧ 후진타오와 김정일 Part.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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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의 화평발전을 북한에 적용하면, 중국은 적극적인 외교적 간섭으로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을 줄이고 평화지향적인 모습을 국제사회에 선전하는 이중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으로 후진타오 집권 1기(2003~2007)시절 김정일과의 관계를 2회에 걸쳐 다루고자 합니다.

후진타오는 200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통해 국가주석이 되자마자 ‘북한 핵위기관리를 위한 영도소조’를 새로이 구성• 운영하지요. 조장은 본인이 직접 맡지요.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James Kelly) 미 대통령 특사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ighly Enriched Uranium) 개발 의혹을 제기했고 이에 북한이 2003년 1월 10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면서 발생한 제2차 북핵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였지요.

후진타오는 장쩌민 보다 김정일에 더 공격적이었지요. 중국 제4세대의 성향이라고 보면 됩니다. 북한의 도발적인 행동을 과거처럼 감싸고 이해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지요. 후진타오는 2003년 8월 김정일에게 “끊임없는 전쟁 준비를 중단하고, 허약한 경제를 건설하는 일에 집중하라”고 충고했지요. 그는 자신과 중국의 원로 세대는 전통적으로 북한과의 밀접한 동맹관계를 중시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보장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시사하면서 3가지 제안을 했지요.

첫째는 북한이 경제자립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둘째는 중국식 개방정책을 추진하며, 셋째는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중단함으로써 주변국들과 관계 개선을 한다면 중국이 앞장서서 북한의 안보를 국제적으로 보장하고 북한 경제 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지요. 이런 그의 제안은 왕이(王毅, 1953~ )외교부 부부장 (8월 7일 방북), 쉬차이허우(徐才厚, 1943~ )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8월 20일 방북) 등의 대북 외교사절을 통해 직접 북한 지도부에 전달했지요.

후진타오와 김정일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6자 회담이지요. 6자 회담은 2003년 8월 27~29일 열린 제1차 회담을 시작으로 현재 제6차 2단계 회의 (2007년 10월 4일)과 수석대표회의 (2008년 12월 8~11일)까지 열렸지요. 그리고 다음 6자 회담은 2010년 3월 재개될 가능성이 높지요. 제1차 회담부터 얘기하기 전에 그 보다 4개월 앞서 열린 3자 회담 (2003년 4월 23~24일)부터 시작하지요.

3자 회담은 중국이 2003년 3월 8일 첸치천(錢其琛, 1928~ )부총리, 왕이 부부장, 푸잉(傳瑩) 아주국장을 김정일이 잠시 묵고 있었던 북한 삼지연에 보내 그에게 다자회담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면서 시작됐지요. 북한이 NPT를 탈퇴한지 2달여만이지요. 과거 제1차 북핵 위기때 ‘강 건너 불구경’ 하는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지요.

김정일은 영빈관에서 첸치천 일행을 맞지요. 그 자리에는 제1차 북핵 위기 해결사였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배석했지요. 첸치천은 중국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를 원하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북한 핵 문제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해결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방침을 전했지요. 그리고 첸치천은 중국의 개혁• 개방의 역사를 설명했지요. 그는 “개혁• 개방 정책으로 중국 인민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됐지요. 평화로운 국제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우리 방식을 당신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을 공유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라고 말했지요. 첸치천은 김정일이 싫어했던 덩샤오핑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설명은 과거 덩샤오핑이 했던 말과 똑같았지요.

김정일도 이에 질세라 조목조목 반박하지요. 그는 “북한과 중국은 조건이 전혀 다르지요. 북한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나라입니다. 중국 같은 대국은 아니지요. 경제 개혁이 중국에 도움이 됐을 지 모르지만 중국 방식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지요. 평화로운 국제 환경이 조성돼야 경제가 발전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아 본 적이 없지요. 이 땅에 평화로운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것은 미국 잘못이지 우리 탓은 아니지요”라고 말했지요.

중국과 북한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위 두 사람의 대화만큼 양국의 입장을 솔직하게 드러낸 대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이래 중국 최고의 외교관이었던 첸치천 이었지만 일단 한 발 물러선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그는 “중국은 북한 핵 위기가 심각해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지요.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이 북한과 미국을 중개할 것이며 이를 위한 3자 회담을 주최하고 싶습니다. 장소는 베이징이 어떻겠습니까. 꼭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제안했지요. 이에 김정일은 난색을 표시했고, 첸치천은 포기하지 않았지요. 첸치천은 “3자라고 하지만 주역은 북한과 미국이지요. 북한과 미국이 논의하고 중국은 잠자코 듣기만 할 것입니다. 중국이 있던 없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지요. 북한과 미국이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요. 미국이 다자 회의라는 형태를 고집하고 있지요. 3자 회담은 그런 미국 입장도 감안한 것이지요”라며 설득했지요.

김정일은 잠시 귀가 솔깃했지요. 그는 “북미 양자 회담은 확실히 가능하겠지요”라고 물었지요. 첸치천은 “그렇게 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답했고, 김정일은 “그러면 참가하지요”라고 말했지요. 결국 김정일이 미국• 중국과의 3자 회담에 참가하기로 결정하는데 중국의 압력이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지요. 중국은 이후 개최된 3자 회담과 그 연장선이 6자 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의 역할을 절충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지요.

중국이 제2차 북핵 위기 해결과정에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중국 외교노선의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요. 이를 통해 중국이 얻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지요. 첫째는 북핵 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책임 있는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지요. 둘째는 북한 핵문제를 단순히 중국과 한반도 차원이 아니라 동북아 지역으로 확대하면서 이 지역에서 미국보다 중국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것이었지요. 셋째는 북핵 문제를 원만히 해결함으로써 미• 중 관계를 우호적으로 발전시켜 국제사회에서 운신의 폭을 확대하려는 것이었지요.

☞고수석 기자는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를 거쳐 통일문화연구소에서 북한 관련 취재를 했다. 중앙일보 전략기획실 차장. 고려대에서 ‘북한· 중국 동맹의 변천과정과 위기의 동학’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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