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절친과 동거한 아내에 쓴 시 [백년의 사랑]

  • 카드 발행 일시2024.06.21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가 들려주는 ‘백년의 사랑’(3)

지난 이야기

1968년 6월 15일 밤, 서울 마포구의 언덕길에서 술에 취한 중년 남자가 버스에 치여 사망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시인 김수영(1921~68). 여섯 살 연하의 아내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기억을 간직한 채 홀로 지내고 있다.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그가 ‘백년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수영이 첫사랑에게 버림받고 방황하던 1942년 일본 유학 시절, 김수영과 동숙하던 이종구가 ‘사랑하는 조카딸’이라며 예뻐하던 김현경을 소개한다. 김현경은 이종구와 김수영을 모두 ‘아저씨’라 부르며 문학을 논한다.

김현경은 첫사랑 배인철 시인을 총격으로 잃는다. 남로당이었던 배인철을 우익이 제거했다는 설이 파다했지만 경찰은 치정사건으로 몬다. 이 사건으로 고립된 김현경을 김수영 시인은 가장 먼저 찾아와 “문학하자”고 말한다.

문학이 사랑이자 구원이었던 두 사람은 관습을 뛰어넘어 동거하고, 결혼해 아이를 갖는다. 그러나 아이를 배 속에 둔 채 김수영은 의용군으로 끌려간다.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포로로 붙잡힌다. 친공과 반공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이던 포로들.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김수영은 생니를 하나씩 뽑는다.

더, 스토리 - 백년의 사랑

“포로수용소는 서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내다버리는 무서운 곳이었어요. 김 시인은 영어를 잘하니까 병원에 있을 땐 미국인 병원장이나 간호사들과 대화가 되고 가깝게 지냈지만, 포로수용소에선 언제 당할지 모르거든요. 다시 병원으로 가려면 병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이를 다 뽑아서 밥을 못 먹으니까, 병원에 보내준 거죠.”

김수영은 부산 거제리 야전병원에서 통역을 맡았다. 병원장은 선물로 김수영 이름이 찍힌 미제 틀니를 만들어줬다.

포로수용소 밖의 풍경도 참혹했다. 김현경의 친정아버지는 1950년 9·28 수복 당시 혼란기에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부친의 그 많던 재산도 모두 다른 이의 수중에 넘어갔다. 피란처에서 아이를 낳은 산모는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김수영의 집안도 풍비박산났다. 동생 수경은 인민군에게 끌려갔고, 수강은 우익으로 몰려 처형됐다. 국군의 서울 수복을 얼마 남기지 않고서였다.

1952년 11월 28일, 오랜 포로생활을 마감하고 김수영이 석방돼 돌아온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김수영과 김현경은 2년3개월여 만에 극적으로 재회했다. 그러나 김수영은 1주일여 만에 일자리를 찾아서 문인들이 모여 있는 피란 수도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후 대구 미8군 수송관 통역 자리를 얻었다.

“살아야 하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영어 통역밖에 없는 거야. 그렇지만 이 양반이 통역 같은 직업을 좋아하지 않아. 결국 그만두고 부산에서 선린상업 야간부에 들어가 영어를 조금 가르치죠.”

김현경은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남편을 찾아 부산에 내려갔다. 김수영은 초량동 기찻길 옆 버려진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철길이랑 한 1m쯤이나 떨어졌나. 철도가 지나가면 집이 흔들렸어요. 판자에다 신문지 붙인 것도 다 떨어지고, 바로 아래는 시궁창이 흘러서 냄새는 나고. 하룻밤 자봤지만 겁이 나더라고요.”

남들이 다 선망하던 미군 통역관 자리는 비굴하다며 집어치우고 김수영이 선택한 삶이었다.

“도저히 여기는 안 되겠다 싶어서 취직 자리도 부탁할 겸 이종구에게 가 봤어요. 그랬더니 방이 두 개나 되고 부엌도 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