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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한국 사회사업분야 이끈 '지팡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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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시국사건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1960년대의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

교내시위가 벌어질 때면 어김없이 완고한 교수 한명이 시위 현장에 나타나곤 했다. 학생들 사이에 '하고집' 으로 통하던 사회사업과 하상락(河相洛)교수였다.

그는 시위대에서 사회사업학과 학생들만을 골라내 소매를 끌어당겼다. 마치 아들을 찾아낸 아버지와도 같았다. '투사' 들도 그 앞에서만은 순한 양으로 변했다. 학생들은 일단 강의실로 갔다가 시위현장에 다시 나왔다. 그러면 혀를 끌끌 차면서 다시 그들을 데리러 나서곤 했던 河교수였다.

지난 19일 86세로 별세한 몽산(夢山) 하상락 교수. 그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사회사업학을 도입한 학계의 거목이었으며, 학생들에겐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사회사업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59년 서울대에 사회사업과(현 사회복지학과)를 만들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학교에 사회사업학과가 있고, 수많은 복지 전문 공무원들이 배출돼 있지만 그 시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미군 작업복을 물들인 바지(일명 쫄쫄이)에 고무신이나 장화를 신은 촌스런 학생 열명을 모아놓고 시작한 강의가 사회사업학의 출발점이었다.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제자들의 회상이다.

▶정구훈(55)=처음엔 교재도 없이 유인물로 수업했지요. 요즘처럼 해적판도 없어 원서를 복사하거나 선생님한테 귀로 듣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개척자란 긍지가 있었습니다. 선생님 스스로 휴강은 절대로 안하시면서 항상 '시간을 꿔먹어선(낭비해선) 안된다' 고 강조했어요.

▶남광성(62)=겉으론 엄하고 속으론 정이 많은 그런 분이었어. 장학금을 달라고 선생님을 아침 9시에 찾아가 오후 5시까지 졸라도 안된다는 거야. 내가 망나니로 유명했잖아. 장학금 받기엔 자격이 미달했거든. 그런데 남몰래 미국의 한 재단에 연락해 그곳의 장학금을 받게 해주신 거야. 졸업 때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드렸더니 물끄러미 보시다가 무뚝뚝하게 하신 말씀이 '지각하지 마' 였어.

경남합천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경기고보와 일본 주오(中央)대 법학부를 나온 고인은 고집스런 원칙주의자였다. 한편으론 "인간일생 여춘몽(人間一生 如春夢)이라 했거늘, 금수강산에 나의 생이 태어났으니 오호라, 몽산(夢山)이라 부르는 게 어떠리오" (저서 『살다 살다 보니』 에서)라고 읊조리던 풍류객이었다.

그는 소유에 집착하지 않았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가 아니라 마음 가짐을 말하는 것이니 희망을 잃을 때 비로소 늙는다" 는 게 신념이었다.

그가 품었던 청춘의 희망은 참된 삶의 실천이었다.

고인은 상아탑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58년) 의료.법조계의 고교동창생들과 함께 서울아동상담소를 세웠다. "지금에 와서 아동복지.소년범죄 등의 사회문제가 대두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예견해 상담소를 시작한 선생님의 혜안이 놀라울 뿐" 이라는 게 제자들의 말이다. 고인과 함께 상담소 창립을 주도한 사람들이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 는 명판결을 남긴 권순영(權淳永)판사, 유석진(兪碩鎭)씨(정신과의사)등이었다.

서울아동상담소는 77년 사회복지법인 자광(慈光)재단으로 확대개편됐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이때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20여년간 자광아동상담원장을 맡았다.

자광은 임상사회사업가.신경정신과의사.임상심리가.법률가 등이 한 팀을 이룬 선진적인 상담시스템을 갖추고 자폐증에 걸리거나 행동장애를 일으키는 어린이들을 상담해 왔다.

개소 후 재정난으로 열세번이나 상담원 시설을 이전할 만큼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매년 4천만~5천만원의 사재를 쏟아부어가며 상담원을 이끌어 왔다.

4년 전 부인 김옥윤 여사가 작고한 뒤 경기도 용문으로 내려가 말년을 준비하던 고인은 7개월간 무의식 상태에서 고통받다 외딸 영경씨와 자광식구들, 제자들의 마음 속에 고이 묻혔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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