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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기행] 한적한 농촌이 예술촌으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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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리란 마을 이름은 조선 중기 시인 이달(李達 ·1539∼1609)의 호인 손곡(蓀谷)에서 유래됐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均)의 스승인 이달은 이 마을에 은거하며 시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임경업(林慶業)장군과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金)씨도 이 마을 출신이다.

손곡리 마을 입구에는 1983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가 세운 손곡시비(蓀谷詩碑)와 원주문화원이 1968년 세운 임경업장군 추모비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다.

손곡리는 지금까지 별다른 특색이 없는 농촌마을로 지내왔다.음력 섣달 그믐 자정에 물의 소중함을 기리는 수구제(水口祭)를 지내는 전통이 이어져 올 뿐이었다.

그러나 새해들어 변화가 생겼다.마을을 예술인촌으로 가꾸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다.주민들은 지난 2월 눈 속을 헤치고 벌목중인 인근 산에서 아름드리 소나무 1백여개를 골라 마을로 옮겨왔다.소나무의 껍질을 벗겨내는 등 손질하는 것도 마을 주민들이 직접 했다.

이달 들어서는 끌과 정을 잡고 나무를 쪼아대고 있다.장승을 만드는 작업이다.주민들이 장승을 먼저 시작한 것은 손곡리 장승이 원주 일원에서는 가장 전통이 있기 때문.

10여년전 석(石)장승으로 바뀌기 이전까지만도 해마다 나무 정승을 깍아 세우는 작업이 수십년 째 이어져 왔었다.장승을 만드는데 노인을 중심으로 하루 7∼8명의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다.주민들은 오는 4월말까지 1백개의 장승을 만들어 장승거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장승거리 조성을 시작으로 예술인촌을 가꾸기 위한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를 열 계획이다.

이같은 작업은 손곡 아카데미가 중심이 돼 추진하고 있다.회화 ·조각 ·염색 ·공예 등을 전공한 5명의 예술인들이 폐교된 손곡초등학교를 임대해 99년 9월 문을 연 손곡 아카데미는 이들의 작업장이자 교육장으로 손곡리 예술인촌의 산실인 셈이다.

장승 깍기 작업이 손곡 아카데미 운동장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모든 행사는 손곡 아카데미 회원들의 기획과 지도로 이뤄진다.역사적 인물에 대한 상생 굿과 추모를 위한 진혼제가 열리고 가을(10월)에는 손곡문학제도 준비하고 있다.회화 조각·도예 작품을 전시하는 손곡미술제도 열린다.

이들 행사 이외에 회색벽 마을 창고를 벽화로 단장하고 손곡저수지로 이어지는 길 등 마을길은 꽃길로 꾸며진다.

손곡리 예술인촌 가꾸기 작업은 이곳에서 예술작업을 벌이면서 도 ·농간 문화 격차를 해소하려는 아카데미 회원들과 역사와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자는 주민들의 뜻이 모아져 시작됐다.

손곡 아카데미 원장 서용은(徐龍殷 ·46)씨는“이 마을에서 창작 작업을 하면서 이 고장이 유서깊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며 “이 작업을 통해 이 마을에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려고 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49년 동안 이 마을의 중심 역할을 해왔던 초등학교가 폐교돼 걱정이 적지 않았던 주민들은 지난해 12월 손곡 아트페스티벌이 이 학교에서 개최돼 외지에서 예술인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자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장 송치호(宋致鎬 ·45)씨는 “단순히 농사만 짓는 마을 보다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건강한 농촌마을로 거듭 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술인촌 가꾸기에 주민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곡 이달이 문학세계를 구축한 손곡리 마을.아카데미 회원들과 마을 주민들은 손곡리가 5백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예술인 촌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믿고있다.

이 마을 어린이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손곡 아카데미에서 예술적인 소향을 쌓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원주=이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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