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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걱정되는 지역연합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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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초등학생인 작은 애가 토요일에는 오후 3시에 피자집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배가 고파 어떻게 기다리느냐며 걱정이 태산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학급 임원선거에서 자신을 뽑아주면 반 학생 모두에게 피자를 사겠다는 공약을 내건 학생이 부회장에 당선됐다는 것이다.

담임선생님이 그 학생의 발언을 제지하거나 그런 약속에 현혹돼 투표를 하면 안된다고 가르치지 않더냐고 물으니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단다. 그러나 작은 애는 피자집에 갈 필요가 없게 됐는데 부회장의 엄마가 피자는 너무 비싸다며 피자빵을 사서 돌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학급선거를 통해 유권자를 매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선 후에 공약을 어기는 것도 배웠으니 장차 우리의 정치가 어떻게 될지 아찔하다. 처음에는 이를 방관한 담임선생님에 대해 화가 났지만 네명 중 한명이 법을 안 지켜도 된다(중앙일보 3월 12일자 1면)고 응답할 정도로 우리의 법 불감증이 심각하니 도덕 불감증이야 오죽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잘못이 반복되다 보면 도덕적 판단기능이 마비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이다. 대통령선거는 아직 2년이나 남았는데 정치인은 물론이고 학자까지 나서서 온갖 지역론을 펼치니 도덕 불감증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

김중권 민주당대표의 영남후보론 발언에 이어 이영작 교수의 호남.충청.강원의 지역연합론이 등장했다. 그 와중에 열린 DJP회동에서 두 여당 오너는 내년 지방선거는 물론이고 차기 대선까지 협력하기로 공조를 다졌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강한 비난을 퍼부었는데 걸핏하면 영남으로 달려가 장외집회를 연 장본인이 DJP지역연합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여기에 한술 더 떠 YS까지 끌어들여 3김 연합을 기도한다는 설도 들린다.

안기부자금 수사가 몸통은 건드리지도 않고 맴도는 것을 보면 이 소문이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은가 보다. 너도나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다 보니 젊은 네티즌들의 지역감정도 심각하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너 어느 도 ××지" 하는 욕설이 토론방을 가득 메운다.

어떤 이는 유권자의 지역주의 투표를 합리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던 당신이 남을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며 내게 반격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199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지역간 연합에 의한 정권교체로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며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DJP연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옹호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지역주의 투표가 무조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익의 배분이 지역에 의해 차별화된다면 항상 손해를 보는 특정지역이 발생하는데, 소외지역 주민은 지역주의 투표를 통해 지역차별을 극복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도 흑인은 인종투표를 통해 낮은 지위를 향상시켜 왔다. 따라서 DJP연합은 분명히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

지역연합에 의한 정권교체는 특정지역의 지역패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경고가 되며, 호남 대통령의 탄생으로 호남인의 한을 달래줄 수 있었던 것도 소득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지역연합을 주장할 명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역연합의 중앙정치가 지방선거를 휩쓸게 되면 지방자치의 자율성은 무참히 짓밟히고 자치단체장은 중앙정당에 종속된다.

작은 애 학급의 부회장 아이가 피자를 대접하지 못하게 된 것은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아이들은 지킬 수 없는 공약에 현혹돼 표를 던지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DJP연합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그것이 정책연합이 아니라 이념과 정책을 달리하는 정당간의 지역연합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도 개혁의 실패로부터 지역주의 투표가 왜 나쁜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국회가 제 기능을 못하는 이유는 지역의 맹주가 정당공천권을 쥐고 의원을 꼭두각시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역적 기반 하나만 가지고 킹메이커를 자임하는 정치인을 방관할 것인가. 그의 야무진 꿈을 깰 수 있는 사람은 유권자뿐이다.

다음 선거에서는 지역감정과 싸워 제2의 선거혁명을 이루자. 그래야 자라는 새싹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떳떳이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는가.

조기숙<이화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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