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측의 급작스런 장관급 회담 불참 통보는 향후 남북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서울 도착 예정시각을 불과 여섯시간 앞둔 13일 오전에야 북측이 일방적으로 불참을 통보해온 데다,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 "김정일 입장 정리 안된 듯" 〓북한은 '여러가지를 고려하여 오늘 회담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고만 밝혔다.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불참이 결정됐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타난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강경자세에 대해 아직 입장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했다는 점이 유력한 요인일 수 있다. 장관급 회담에 참가하게 되면 남측이 자신들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할 여러가지 대안에 어떤 식으로든지 응답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상황을 부담스러워했다는 분석이다.
북한으로선 '체제 붕괴가 예정돼 있다' 고 공언하는 부시 행정부에 대한 입장정리도 벅찰 것으로 보인다. 생존을 위해선 대미(對美)관계 정상화가 불가피하다고 판단, 이런 기조 아래 클린턴 정부와 협상했으나, 부시 정부에선 '새로운 접근법' 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이종석(李鍾奭)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 연구실장은 "한.미 정상회담의 여진(餘震)이 있는 상태에서 김정일 답방 논의 등에 부담을 느꼈을 수 있다" 며 "이런 분위기와 장관급 회담을 분리하려는 북한의 시간 벌기 전략으로 본다" 고 말했다.
결정권을 쥔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지난달 14일 이후 한달간 공개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 "고도의 대남 전술" 〓 '대북 설득' 과 '한.미 공조' 등 한.미 정상의 합의사항 때문에 불편해진 심기를 우선 남북대화 테이블을 거부함으로써 내비쳤다는 분석이다.
金위원장의 답방 성사 등 남북관계 개선에 역점을 두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을 압박해 상황 반전을 노린다는 것이다. 즉 '미국 얘기만 듣고 우리를 설득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라' 는 간접 메시지라는 것이다.
◇ 전망〓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은 지난달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장관급 회담이 향후 金위원장 답방 논의의 창구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답방 논의의 중심 축에 금이 간 셈이다. 그러나 북한이 6.15 남북 공동선언의 틀을 깨지 않는 이상 시기가 문제지 약속은 지켜질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최진욱(崔鎭旭)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金위원장의 서울 방문도 상반기에서 가을로 미뤄지는 등 유동적일 가능성이 커졌다" 면서 "그러나 파국으로 가지는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남북관계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 이라고 분석하면서 대책을 세우고 있으나 아직은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는 정도다. 북한을 방문하고 14일 오후 귀국하는 김한길 문화부장관은 13일 문화부 관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돌아가면 얘기를 하겠다" 고 말해 평양측 분위기가 좀더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영종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