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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샐러리맨에서 재계 12위 총수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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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호 24면

강덕수

10년 전까지만 해도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샐러리맨이었다. 그는 그러나 10년 만에 STX그룹을 재계 12위(공기업 제외)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 때문에 그는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불린다.

강덕수 회장은

그는 부잣집 아들도 부자도 아니었다. 1950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상고(동대문상고)와 야간대학(명지대 경영학과)을 졸업하고 쌍용양회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27년간 근무했다. 입사 초년 때부터 뛰어난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쌍용양회의 경영관리·기획·금융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93년에는 쌍용중공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까지 올랐다.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쟁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말단 사원부터 시작해 현장에서 실무를 쌓았다. 그래서 그의 경영스타일도 그 시절 경험에서 나온다. 현장을 누비면서 그 자리에서 지적을 하고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던 중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000년 외환위기로 경영난을 겪던 쌍용그룹이 쌍용중공업의 퇴출을 결정하고 지분을 한누리컨소시엄에 매각했다. 쌍용그룹 입장에서는 포기였지만 그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기회였다. 대주주인 한누리컨소시엄은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주인처럼 일하는 그(당시 전무)를 대표이사로 발탁했다. 이때만 해도 쌍용중공업 주식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애물단지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그는 미래를 봤다. 순간 그는 오너처럼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너가 돼 회사를 경영하면 승산이 있겠다고 확신을 가졌다. 경영권을 확보할 만큼의 지분을 사기 위해서는 최소 20억원이 필요했다. 주위에서는 무모하다고 했지만 그는 밀고 나갔다. 그는 인수 결심을 굳히고 가족과 동해안 여행을 갔다. 그는 비장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를 직접 경영하려고 한다. 가산을 모두 쏟아부어야 할 것 같다. 잘될 거라고 확신하지만, 백의 하나 실패할 경우 너희들 학비를 대지 못할 수도 있다.”

중·고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아빠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는 눈치였지만 어찌 됐든 동의했다. 그는 갖고 있던 아파트 세 채를 팔거나 담보로 대출받아 운영자금을 조달했다. 물론 전셋집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2001년 쌍용중공업 최대주주에 오른 그는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독자생존을 위해 경영체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사명도 바꿨다. STX는 시스템과 기술이 훌륭한(System Technology eXcellence) 회사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지속적인 노력 끝에 그는 쌍용그룹도 포기한 쌍용중공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당시 50여 개 퇴출 기업 중 유일하게 경영정상화를 일궈낸 사례다. 운도 따라줬다. 때마침 불어준 해운·조선의 호황 바람은 회사를 키우는 발판이 됐다.

그는 해운과 조선을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가려고 했다. 그리고 공격적으로 인수합병(M&A)에 나섰다. M&A를 할 때 최우선 고려 사항은 시너지 효과였다. 그래서 그가 가장 자주 쓰는 말도 시너지다. 그는 M&A 때 당장은 비싸 보여도 기존 사업과 시너지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베팅을 했다. 대동조선을 인수할 때는 경쟁사가 제시한 금액의 두 배인 1000억원을 인수가격으로 써냈으며 범양상선을 인수할 때도 경쟁업체 평균 제시 가격보다 20% 많은 4199억원을 제시했다.

그는 수직계열화라는 명확한 방향을 잡고 사업을 확장했다. 쌍용중공업이 하던 선박엔진 사업을 하다 보니 조선소(대동조선)를 인수했고 배를 만들다가 해운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해운회사(범양상선)를 인수하는 식이었다. 조선소에 광물을 실어 나를 배를 만들 수 있으니 에너지 분야(산단에너지)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잇따른 M&A와 신규 사업 진출로 STX는 재계 순위 12위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지난해 STX 매출은 출범 당시보다 100배가량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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