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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사이코패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97년에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고베(神戶)시에서 누군가가 11세의 초등학생을 살해한 뒤 절단한 시체 일부에 '자, 이제 게임이 시작됐다' 는 문구를 붙여 중학교 정문 앞에 갖다놓았던 것이다.

경찰이나 매스컴은 처음에는 성인이 저지른 흉악범죄로 추정했다. 범인이 어려운 한자를 잔뜩 섞은 '도전장' 이란 것을 지방신문사에 발송하는 등 교활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의 제보로 한달여 만에 잡힌 범인은 피해자와 한 동네에 사는 14세의 중학교 3년생이었다. 게다가 수사결과 소년은 다른 초등학교 여학생 한 명도 살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본의 전국민이 경악했다.

소년은 학교생활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공포물 비디오나 엽기적인 범죄를 다룬 서적.만화를 유달리 좋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정신감정 결과 '비정상적인 쾌락을 얻으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는 결론이 나왔다. 소년은 법원의 보호처분 결정으로 지금 '의료소년원' 에 수용돼 있다.

'사이코패스(psychopath)' 는 독일학자 슈나이더가 1920년대에 소개한 개념이다. 독일어 발음으로는 '프시코파트' . 간단히 말해 '성격 탓으로 인해 자신.타인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를 괴롭히는 정신병질(精神病質)' 을 말한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정신병과는 다른 개념인 셈이다. 그러나 사이코패스는 자칫하면 사람을 차별하는 도구로 쓰일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한동안 사용이 기피되다 70년대 들어 미국에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슈나이더는 발정(發情).광신.자기현시.의지결여.폭발적 성격.무기력 등 열가지 특징을 사이코패스에 속하는 인격 유형으로 규정했다.

고베의 '소년 살인마' 도 범행과정만 보면 사이코패스로 분류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문제는 성장 중인 청소년이라는 점이다. 잔인한 비디오가 범행에 영향을 끼쳤다면 타고난 성격을 문제삼기 전에 주위 어른들이나 사회의 잘못도 지적해야 마땅하다.

며칠 전 국내에서도 14세 중학생이 친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에 붙잡힌 뒤 "살인하면 무슨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 고 말했다니 몸서리쳐진다. 이 소년도 잔혹하고 엽기적인 내용의 인터넷 사이트를 자주 들락거렸다고 한다. 혹시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의 마음이 황폐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변환경부터 잘 살펴야겠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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