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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통일방안변화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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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대내외 통일환경을 합목적적으로 변화·유도하여 하나의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우리의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통일정책이다.
또한 통일에 대한 정부의 입장, 통일의 원칙, 통일에의 접근방식 등을 포괄하여 행동지침 또는 행동계획으로 구체화한 것이 통일방안이다.
따라서 통일정책과 방안은 다른 정책과 마찬가지로 시대적 상황, 국민의 여망, 정부의 정책적 의지 등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통일정책과 방안은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단절된 채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정책의 일관성을 바탕으로 기존의 통일정책과 방안을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보완·발전되어 왔다.

1.북한지역 자유총선거론
남한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설치와 한국의 총선거에 관한 결의(제112Ⅲ)」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동년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리고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임을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우리 정부의 통일정책은 자유총선거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최초의 우리 통일방안은 유엔 결의에 의한 북한지역에서만의 자유총선거였다.
대한민국은 유엔의 결의와 감시하에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수립된 한반도에서의 유일 합법정부이기 때문에, 유엔 결의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를 거부하였던 북한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함으로써 국회의 잔여의석 100석을 채운다는 것이었다.
제헌국회는 1948년 6월 12일 『북한에서도 우리와 같이 유엔 결의에 의거하여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속히 총선거를 실시하여 선출된 대표를 우리 국회로 보내주기 바란다』는 요지의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승만 국회의장은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헌법 공포식에서의 기념사를 통해 북한 동포에게 『100석의 의석이 그들의 대표를 위해 공석으로 유보되어 있음』을 상기시키고, 『북한도 유엔 결의에 순응하여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선출된 대표를 국회에 보내도록 요청한다』고 하였다.
그후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함과 동시에 통일에 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 헌법 규정에 따라 전체 한반도에 대한 유일 합법정부이다.
▷선거가 보류된 북한에서 조속히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여 북한동포를 위하여 국회에 공석으로 남겨 둔 100석의 의석을 채워야 한다.
▷북한 수복과 관련, 북한동포들의 자발적 의사가 계속적으로 봉쇄되는 경우 대한민국은 무력에 의해서라도 북한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권한이 있다.』
북한지역에 대한 주권 회복을 위한 무력행사 不辭論은 정치적 구호 또는 상징적 의미가 짙으며, 실천적 차원에서보다는 북한의 「남북협상론」 또는 「주한미군 철수론」에 대한 대응과 우리의 안전보장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북한과의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였다.
남북협상론(南北協商論)과 관련하여 1949년 2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문제에 관한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통일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대한민국 정부의 존립목적하에서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이며, 북한 괴뢰정권과의 협상은 공산정권에 대한 묵시적인 승인을 뜻하는 것이니, 이같은 모욕적인 협상은 결코 있을 수 없다.』

2.남북 자유총선거론
북한지역에서만의 자유총선거론은 1954년의 제네바 정치회담을 계기로 남북의 자유총선거론으로 전환되었다.
이 회담에서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은 6월 14일 14개항의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그 요지는 『통일독립한국의 수립을 목적으로 유엔의 결의와 감시하에 대한민국 헌법절차에 따라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제네바 정치회담 이후에도 정부의 통일에 대한 기본입장은 유엔 결의에 의한 통일의 실현이라는데 변함이 없었다.
1954년 11월 11일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의 결의에 의해 수립되고 유엔에 의하여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되었다는 전제하에 『유엔감시하에 북한지역에서 전공산군이 철퇴한 후 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을 확충하는 것』만이 국시임을 천명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의 자유당 정부가 무너지고, 7·29선거에서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4·19혁명으로 보수·혁명으로 보수·혁신할 것 없이 많은 정당들이 등장하였으며, 이에 따라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되었고 또한 다양한 통일방안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민주당 정부의 통일방안은 기본적으로는 유엔감시하의 남북 자유총선거였다.
그러나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제시된 통일방안과 다른 점은 「유엔의 결의에 의거하여」가 「유엔의 결의를 존중하여」로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1960년 8월 24일 당시 정일형 외무부장관은 「7개항의 외교정책성명」에서 『「북진통일같은 무모하고 무계획적인 슬로건을 버리고 유엔의 결의를 존중하여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정책을 수행한다』고 천명했다.
정일형 외무부장관은 9월 10일 국토통일에 관한 국회질의 답변에서 「유엔의 결의에 의거하여」를 「유엔의 결의를 존중하여」로 바꾼 이유로서 아시아·아프리카 신생국의 대거 유엔 가입으로 유엔의 판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한국의 통일에 관하여 유엔의 어떠한 決意가 있다고 하여도 대한민국의 헌법절차가 무시될 수는 없다고 강조하였다.
민주당 정부의 통일에 대한 입장과는 달리 혁신계를 비롯하여 국내외에서 남북교류론과 중립화통일론이 공공연하게 주장되기에 이르고 이에 동조하는 일부 학생들의 움직임이 있게 되자, 11월 2일 장면 국무총리는 「한국 중립화에 대하여」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이미 선언한 바 있고 그 이후 매년 유엔총회의 「統韓에 관한 결의」에 의하여 재확인된 원칙대로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함으로써 평화적 방법에 의한 자유민주통일을 성취하고자 한다』고 유엔감시하의 남북 자유총선거를 재확인하고, 오스트리아식 중립화통일론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제5대 국회도 같은 날 「한국통일 및 유엔가입에 관한 결의」를 통해서 통일에 대한 기본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통일독립민주한국을 수립한다는 유엔의 기본원칙에 따라 한국 국민의 자유화의 기본원칙에 따라 한국 국민의 자유와 국가의 안전이 항구적으로 또 확고히 보장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하고 대한민국헌법 절차에 의하여 유엔 감시하의 인구비례에 따라 자유선거를 실시한다』
이와 같이 정부와 국회의 통일에 대한 확고한 입장과 사회 일각에서의 경계론에도 불구하고 1961년에 들어오면서 혁신계를 비롯한 일부 학생들의 중립화통일론, 남북협상론, 남북교류론 등은 더욱 고조되었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 민족통일연맹,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등의 혁신적 통일기구가 발족한 것도 이 때였다.

3.국토통일을 위한 실력배양론
국내정국이 극도로 혼란하고 무분별한 통일논의가 난무하던 1961년 5·16이 일어났다.
군사혁명위원회는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는데, 그 제1항에서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고 규정하였다.
제5항에서는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기울인다』고 천명함으로써 결국 반공체제의 재정비 강화와 국토통일을 위한 실력배양이 통일의 기본방향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기본방향에 입각한 혁명정부의 통일방안은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제시되고 그후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견지되어 왔던 유엔 감시하의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총선거였다.
그러면서도 북한 동포의 해방과 실지회복에 의한 통일을 강조하였다.
김홍일 외무부장관은 1961년 6월 24일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는 무력에 의한 통일을 원하지 않으며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을 추구하여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언명하였다.
그후 11월 15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의 공동성명에서 『유엔총회에 의하여 천명되고 재확인된 원칙에 따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국의 자유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천명하였으며, 1962년 8월 15일 광복 17주년 기념연설에서는 『우리들은 공산주의 전제와 압제에서 북한동포를 해방시켜야 하고 가능한 한 시급히 북한동포에게 우리와 같이 자유를 누리게 해야 한다.
혁명정부는 조국의 비극적인 양단을 현명하게 해결해서 통일을 이룩하고, 이리하여 가능한 한 최단시일내에 북한동포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혁명정부의 이러한 통일정책은 민주당 정부의 통일정책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먼저 실력을 배양한 다음에 통일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4.선건설 후통일론
1963년 12월 17일 민정이양으로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1964년 1월 10일 대통령 연두교서에 나타난 민주공화당 정부의 통일정책은 ▷유엔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통일 ▷失地회복에 의한 통일 ▷통일을 위한 제반 문제에 대비하기 위한 연구와 태세의 정비 등이었다.
각계에서 통일논의가 재연되고 있던 때인 1964년 11월 29일 국회는 국토통일방안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유엔감시하의 남북 자유총선거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재확인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 비례에 따라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국토를 통일한다.
▷선거감시단은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유엔회원국 중에서 선임되어야 한다.
▷통일된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통일방안은 일체 배제한다.
1965년 한·일 회담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시위와 이에 편승한 무절제한 통일 논의가 일어나자 정부는 통일에 대한 입장을 재천명하고 「선건설(先建設) 후통일(後統一)」의 정책방향을 분명히 하였다.
1966년 1월 18일 국회에 보낸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의 지상 명제는 바로 조국통일』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지향하는 조국 근대화야말로 남북통일을 위한 대전제요 중간목표이다.
통일의 꿈이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이 경제자립에 있는 것이라면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어 6월 8일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는 『남북한 통일문제는 70년대 후반기에 가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본다』고 함으로써 혁신계 정치인들의 통일논의를 반박하고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를 제한하였다.
1967년 1월, 국회에 보낸 대통령 연두교서에서도 우리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야 할 것은 경제건설과 민주역량의 배양이라고 하면서 「선건설 후통일」의 기본입장을 다시 강조하였다.
『공업입국의 조국근대화가 이루어질 1970년대에는 국토통일의 전망이 밝아 올 것이다.
오늘 이 단계에 있어서 통일의 길은 경제건설이며 민주역량의 배양이다.
우리의 경제, 우리의 자유, 우리의 민주주의가 북한으로 넘쳐 흐를 때 그것은 곧 통일의 길이다.
최근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유엔내에 나타나기 시작한 유동적인 사태와 또 앞으로 예상되는 어떠한 추이에 대해서도 신축성 있는 대책으로 임할 것이며, 통일문제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국민의 중지를 모으는데 힘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 부응하고 통일문제에 대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방안 수립을 위해 1969년 3월 1일 정부부처의 하나로서 국토통일원이 설치되었다.
최규하 외무장관이 1969년 10월 11일 발표한 統韓覺書에 나타난 제3공화국의 통일방안은 다음과 같다.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통일이어야 한다.
토착인구비례에 따라 대표가 선출되는 전한반도를 통한 자유선거이어야 한다.
자유선거를 보장하기 위한 유엔의 감시가 있어야 하고 평화와 안전을 위한 조건이 성숙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새로운 침략을 막기 위하여 유엔군이 주둔해야 한다』

5.8·15 평화통일 구상 선언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국제정세의 조류는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 미-중국 접촉, 미·소·일·중간의 새로운 세력균형 형성 등으로 인하여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의 기운이 급진전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1960년대의 「선건설 후통일」에 입각한 내적 실력배양을 바탕으로 제3공화국 후반기의 통일정책은 매우 신축적이면서 현실성과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그전에 금기시되었던 통일논의도 국토통일원의 설치를 계기로 학문적·연구적 차원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우리 정부가 자주적 입장에서 북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고 통일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며, 그 직접적 출발점은 1970년 8월 15일 광복절 제25주년 대통령 경축사에서 발표된 「평화통일구상선언」이다.
이 8·15선언은 북한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복기도를 완전히 포기할 것』을 전제로 남북한의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살게 할 수 있으며, 더 잘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긴장상태의 완화없이는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에의 접근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무엇보다 먼저 이를 보장하는 북괴의 명확한 태도 표시와 그 실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괴는 무장공비 남파 등의 모든 전쟁도발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소위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해 온 종전의 태도를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점을 명백하게 내외에 선언하고, 또한 이를 행동으로 실증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요구를 북괴가 수락,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인정할 수 있고 또한 유엔에 의해서도 명백하게 확인될 경우에는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으며 남북한간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바입니다.
또한 북괴가 한국의 민주, 통일, 독립과 평화를 위한 유엔의 노력을 인정하고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한다면 유엔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 북괴가 참석하는 것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구상에 덧붙여서 한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북괴에 대하여 더이상 무고한 북한 동포들의 민생을 희생시키면서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죄악을 범하지 말고 보다 선의의 경쟁, 즉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그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살게 할 수 있으며, 더 잘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 하는 것을 묻고 싶은 것입니다.』
이 선언의 특징적 내용은 첫째, 남북간 긴장상태의 완화없이는 평화적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 점이다.
둘째, 북한에게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 전복기도를 포기하도록 촉구한 점이다.
셋째, 남북간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한 점이다.
넷째, 북한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한다면 북한의 유엔 참석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한 점이다.
다섯째, 남북한의 어느 체제가 더 잘살 수 있는 사회인가에 대한 개발과 건설의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한 점이다.
이 선언이 갖는 의의는 ▷종래의 통일정책에 있어서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입장에서 북한 공산정권의 존재마저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나, 이 선언을 계기로 북한지역에도 공산정권이라는 사실상의 정권이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러한 바탕위에서 남북간의 대화와 협상, 교류와 협력을 통해 평화통일의 여건을 조성해 나가겠다고 한데 있었다.
민족의 통일 문제를 유엔에 의해 해결하겠다던 종래의 입장에서 벗어나 남북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이 8·15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1971년 8월 12일 1천만 남북이산가족찾기운동을 제의하였고, 북한적십자사가 8월 14일 이에 동의함으로써 분단 26년만에 인도적 차원에서부터 남북대화가 열리기 시작했다.
특히 김용식 외무부장관은 8월 31일 기자회견에서 ▷인도적 문제의 해결, ▷비정치적 문제의 해결 ▷정치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남북문제 해결의 3단계론을 제시했는데, 이 3단계론은 1970년대 이후 정부의 통일접근의 기본이 되어 왔다.
인도적 차원의 남북적십자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 남북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당국간의 공식문서라 할 수 있는 「7·4남북공동성명」이 1972년 7월4일 발표되었다.
이 공동성명은 7개항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의 원칙에 대한 남북간의 합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武力行使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로 남북관계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人道的 차원의 적십자회담과 께 정치적 차원의 남북조절위원회 회담도 진행됨으로써 남북간에는 두개의 대화통로가 열리게 되었다.

6.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1972년 10월유신으로 제3공화국이 끝나고 이어서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4공화국은 統治權의 강화라는 측면 이외에는 모든 면에서 제3공화국과 같았고, 따라서 통일정책도 제3공화국 통일정책의 연장선장에서 이루어졌다.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 1년 뒤인 1973년 6월23일 정부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모든 노력의 경주, ▷한반도의 평화유지, 남북한간의 내정불간섭 및 불침략, ▷성실과 인내로써 남북대화 계속, ▷북한의 국제기구에의 참여 불반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반대, ▷모든 국가에의 문호개방, ▷평화선린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추진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6·23선언)을 발표하였고, 1974년 1월 18일에는 ▷무력 불침범 약속, ▷내정불간섭,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현행 휴전협정의 효력 존속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남북불가침 협정 체결」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제안들은 북한을 결코 국가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북한에도 정치체제가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러한 현실 인정의 바탕위에서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남과 북의 두 체제가 평화공존을 해가자는 것이었다.
정부는 1970년의 8·15선언 이후 취해 온 남북간의 평화공존과 평화통일을 위한 여러가지 제안들을 종합·체계화하여 1974년 8월 15일 대통령 광복절기념사를 통해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하여 남북은 상호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여야 한다.
둘째, 남북간에 상호 문호를 개방하고 신뢰를 회복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남북대화를 성실히 진행시켜야 하며, 다각적인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이 바탕위에서 공정한 선거관리와 감시하에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을 이룩한다.
이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이 내포하고 있는 주요정책의 표현은 첫째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정착, 남북간의 대화와 교류가 필수적 과정이라는 점, 둘째 남북한 총선거를 위해서는 남북간의 신뢰조성과 동질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셋째 총선거 감시기구가 정부수립후 처음으로 유엔감시하에서 공정한 선거관리와 감시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은 종전의 선건설 후통일에서 「선평화 후통일」로 정책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그 이후 우리 정부 통일정책의 기본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의 정부의 통일방안은 이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을 기본으로 하여 보완·발전되어 왔다.
보완내용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남북한 총선거 이전의 중간단계의 설정이었다.

7.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
1981년 3월 3일 출범한 제5공화국 정부는 6월 5일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간의 직접회담」을 제의하였고, 1982년 1월 22일 대통령 국정연설을 통해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방안은 『「통일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거하여 겨레 전체의 의사가 골고루 반영되는 민주적 절차와 평화적 방법으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에 입각하여 통일헌법의 제정으로부터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민주공화국 완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이 방안은 통일방식과 통일에 이르는 과도적 조치라는 두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선 통일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쌍방 주민의 뜻을 대변하는 남북한 대표들로 민족통일협의회의(民族統一協議會議)를 구성하여 이 협의기구에서 민족, 민주, 자유, 복지의 이상을 추구하는 통일민주공화국의 완성을 위한 통일헌법 초안을 마련하여 이 헌법 초안을 남북한 전역에 걸쳐 민주방식에 의한 자유로운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확정·공포하고, 확정된 통일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국회와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한다』
그리고 통일국가의 국호, 정치이념, 대내외정책의 기본방향, 정부형태, 총선거의 방법과 절차 등의 문제는 「민족통일협의회의」에서 통일헌법을 기초하는 과정에서 상호 협의·해결한다는 것이다.
통일에 이른 過渡的 조치로는 남북한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안)을 제시하였다.
▷통일국가를 수립할 때까지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상호 관계를 유지
▷분쟁의 해결에 있어서 모든 형태의 무력 및 폭력의 사용 또는 위협을 완전히 지양, 모든 문제를 상호 대화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
▷상호관계에 있어서 현존하는 상이한 정치질서와 사회제도의 상호 인정, 상대방의 내부문제에 일체 불간섭
▷긴장완화와 전쟁방지를 위해 현존 휴전체제의 유지, 군비 경쟁의 지양과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 조치를 협의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고통과 불편 해소, 민족적 신뢰와 화합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상호 교류·협력을 통해 사회적 개방을 추진, 이산가족의 인도적 재회문제를 포함하여 남북한의 자유로운 왕래와 다각적인 교류를 추진할 수 있도록 교역, 교통, 우편, 통신, 체육, 학술, 교육, 문화, 보도, 보건, 기술, 환경보존 등 제분야에서 협력하며, 이를 통해 민족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구체적 노력을 경주
▷통일시까지 사상, 이념, 제도의 차이에 구애됨이 없이 세계 여러나라들과 각기 체결한 모든 쌍무적 및 다자간 국제조약과 협정을 존중하며, 민족의 이익에 관한 문제를 서로 협의
▷각료급 전권대표를 임명하여 서울과 평양에 상주연락대표부를 설치
즉, 통일에 이르는 과정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남북간에 신뢰를 조성하고 민족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통일을 저해하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작업도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한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을 체결하여 그동안의 민족자해적(民族自害的)이며 비정상적인 상호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민족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민족자애적(民族自愛的)인 정상관계로 전환시킨다는 것이었다.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의 특징은 첫째, 평화통일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민족·민주·자유·복지라는 未來像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통일을 과정으로 보고 분단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통일의 완성까지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려면 그 과정에서 민족화합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넷째, 남북한 총선거의 규범으로서 남북한의 대표가 협의하여 제정(制定)하게 될 통일헌법 및 이 헌법에 따라 통일민족국가를 완성시키는 과정과 절차를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민족화합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조치로서 1982년 2월 1일 손재식 국토통일원 장관은 성명을 통해 「20개 시범실천사업」을, 2월 25일에는 「남북고위대표회담」을 제의하였다.

8.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1988년 2월 25일 출범한 제6공화국은 처음으로 헌법에서 분단현실을 인정하고 통일은 평화적으로 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하였다.
헌법 전문에서는 조국의 평화통일의 사명을, 제4조에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의 수립과 추진을, 그리고 제66조 3항에서는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는 것을 규정하였다.
제6공화국 정부는 출범과 함께 과거와는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남북관계의 정립을 위한 통일정책을 전개하였다.
즉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면서 민족자존(民族自尊)과 화해를 통한 민족공동체 형성에 다각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정책적 표현이 1988년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과 1989년 9월 11일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다.
7·7선언은 북한을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선의의 동반자로 간주하고, 남과 북이 함께 번영을 이룩하는 민족공동체로서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통일조국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남북간의 대결구조(對決構造)를 화해의 구조로 전환시켜 나가는 데 필요한 조치의 기본방향을 제시한 정책선언이었다.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체육인, 학자, 학생 등 남북 동포간의 상호 교류를 적극 추진하며 해외동포들이 자유로이 남북을 왕래하도록 문호를 개방한다.
▷남북적십자회담이 타결되기 이전이라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이산가족들간에 생사·주소확인, 서신거래, 상호방문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 주선·지원한다.
▷남북간 교역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간 교역을 민족내부교역으로 간주한다.
▷남북 모든 동포들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킬 수 있도록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비군사적 물자에 대해 우리 우방들이 북한과 교역을 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남북간의 소모적인 경쟁·대결외교를 종결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에 발전적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하며, 또한 남북대표가 국제무대에서 자유롭게 만나 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희망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 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또한 우리는 소련,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
7·7선언은 민족공동체 형성을 위한 남북간의 인적·물적 교류협력의 기본적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남북간의 교류협력은 이 7·7선언 이후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이 선언에 따른 대표적 조치중의 하나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1989. 8. 1. 공포·시행)이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1989년 9월 11일 국회에서 대통령의 특별선언을 통해 발표되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7·7선언을 계승한 것이며 남북간에 누적된 불신과 대결의식, 그리고 이질화 현상을 그대로 둔 채 일시에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려면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먼저 민족공동체(民族共同體)를 회복 발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일의 원칙으로는 「자주·평화·민주」를 제시하고 있고 통일국가의 미래상으로는 자유, 인권, 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를 제시하였다.
통일국가의 수립절차는 남북대화의 추진으로 신뢰회복을 기해 나가는 가운데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민족공동체헌장」을 채택하고, 남북의 공존공영과 민족사회의 동질화, 민족공동생활권의 형성 등을 추구하는 과도적 통일체인 「남북연합」을 거쳐, 통일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완전한 통일국가인 통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남북연합단계에서는 민족공동체현장에서 합의하는데 따라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 남북평의회, 남북공동사무처 등을 둔다는 것이다.
『통일된 우리의 조국은 민족성원 모두가 주인이 되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로서 각자의 자유와 인권과 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국가여야 합니다』
『통일을 이루는 원칙은 어디까지나 민족자결의 정신에 따라 자주적으로,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그리고 민족대단결을 도모하고 민주적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갈라지고 이질화된 민족사회를 그대로 두고 하나의 국가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민족공동체를 올바로 회복·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통일을 앞당기는 일입니다.
통일로 가는 중간단계로서 먼저 남과 북은 서로 다른 두 체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을 바탕으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공영하면서 민족사회의 동질화와 통합을 촉진해 나가야 합니다.
남북간에 개방과 교류·협력을 넓혀 신뢰를 심어 민족국가로 통합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사회·문화·경제적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면서 남북간에 존재하는 각종 문제를 해결해 간다면 정치적 통합의 여건은 성숙될 것입니다.
통일을 촉진할 이 과정을 제도화하기 위해 쌍방이 합의하는 헌장에 따라 남북이 연합하는 기구를 설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연합체제 아래에서 남과 북은 민족공동생활권을 형성하여 공동의 번영을 이룩하고, 민족동질성을 회복토록 하여 민족공동체의 발전을 보다 가속화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통일국가로 가는 중간과정의 과도적 통일체제라 할 수 있습니다.
남북연합은 최고결정기구로 남북정상회의를 두고, 쌍방 정부대표로 구성된 남북각료회의와 남북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남북평의회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남북은 각료회의와 평의회 업무를 지원하고 합의사항 이행 등 실무를 위해 「공동사무처」를 두고 서울과 평양에 상주연락대표를 파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각료회의는 남북의 총리를 공동의장으로 하여 각각 10명 내외의 각료급 위원으로 구성하고, 그 안에 인도, 정치·외교, 경제, 군사, 사회 문화분야 등의 상임위원회를 둘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평의회는 100명 내외로 쌍방을 대표하는 동수의 남북국회의원으로 구성하되, 통일헌법의 기초와 통일을 실현할 방법과 그 구체적 절차를 마련하고, 남북각료회의의 자문에 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평의회는 통일헌법의 기초과정에서 통일국가의 정치이념·국호·국가형태 등을 논의하고, 대내외정책의 기본방향이나 정부형태는 물론 국회구성을 위한 총선거의 방법·시기·절차 등을 토의하여 합의해야 할 것입니다.
남북은 각기 구상하는 통일헌법 초안을 남북평의회에 내놓고 합리적인 단일안을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통일헌법안이 마련되면 민주적 방법과 절차를 거쳐 확정 공포하고 이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마침내 통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여 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특징은 첫째, 자주·평화·민주의 통일 3원칙을 재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분단현실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민족공동체의 회복이라는 「민족통일」을 거쳐 정치적 통일인 국가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셋째, 남북간의 상호협력과 공존공영의 관계를 증진시켜 통일기반을 조성해 나가는 과도적 통일체제인 남북연합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남북간의 모든 현안문제를 협의·해결해 나간다는 입장에서 민족동질성의 회복을 위한 교류협력의 추진과 병행하여, 정치·군사문제도 함께 해결해 나간다는 점이다.
다섯째, 자유, 인권, 행복이 보장되는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통일국가의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9.민족공동체 통일방안
1993년 2월 25일 출범한 현정부의 통일정책은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 5월 24일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제26차 총회에서의 「태평양시대의 한국의 신외교」라는 기조연설, 7월 6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6기 출범식에서의 개회사, 그리고 1994년 8월 15일 제49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그 기본방향과 구체적 내용들이 제시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신한국의 창조」가 곧 통일조국 건설의 지름길이라고 하면서 변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의 창조를 제창했다.
그러면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상적 통일지상주의가 아니라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태평양경제협의회 제26차 총회에서의 기조연설에서는 신외교정책을 천명하면서 『통일은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단계를 거쳐 1민족 1국가의 통일조국을 이룩할 것』이며, 『이같은 통일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새정부는 자발적인 국민동의를 바탕으로 하여 공존공영과 민족복리를 추구해 갈 것』이라고 하였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6기 출범식에서는 『내실없는 통일을 감상적으로 바래서는 안된다』는 전제하에 「자유와 번영」이 보장되는 통일을 위해 『통일된 조국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고 복지와 인권이 존중되어야 하며』, 『통일로 가는 과정은 민주적이어야 하며, 통일의 길은 민족번영의 길이 되어야 한다』는 점진적·평화적·민주적 통일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즉 화해·협력단계와 남북연합단계를 거쳐 1민족 1국가의 통일조국을 건설한다는 내용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밝혔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제49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그동안 기회있을 때마다 밝혀 왔던 통일정책에 대한 기본구상들을 체계화하여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기본인식, 통일의 기본철학, 통일원칙, 통일과정, 통일국가의 미래상, 대북정책과 남북관계개선의 기본방향, 통일을 위한 실질적 대비태세의 확립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종합적 통일정책인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종합적 통일방안이 나온 배경은 세계사의 흐름과 남북한 체제경쟁에 대한 기본인식에 있다.
즉, 『세계사는 이미 자유민주주의 승리를 선언하였고, 전세계와 인류는 이미 냉전 대신에 자유화, 복지화, 개방화의 길을 걷고 있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20세기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듯이 남북 사이의 체제경쟁도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과 더불어 이렇듯 어렵게 확립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수호되어야 하며,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은 결코 용납(容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시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통일민족사를 능동적으로 끌어갈 의지와 자신감을 토대로 그동안 우리 정부가 꾸준히 추구해 온 통일정책구도를 보다 명확히 하면서 앞으로의 대북정책의 추진방향을 분명히 제시한 데 그 의의가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통일은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통일의 기본철학, 통일의 원칙, 통일조국의 미래상을 분명히 한 점이다.
둘째, 통일은 7천만 민족이 다함께 잘살기 위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공동체의 건설을 통해 정치적 통일(국가통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 점이다.
셋째, 통일의 주체는 민족구성원 모두임을 강조한 점이다.
넷째, 점진적·단계적 통일이 정부의 기본입장이지만, 예기치 않은 통일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사전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 점이다.
다섯째, 북한의 개혁·개방과 대남혁명전략의 전환을 분명히 촉구한 점이다.
여섯째, 민족분단의 종식에 있어서 우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야 함을 분명히 밝힌 점이다.
일곱째, 통일에 따른 부담과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국민의 자세를 분명히 일깨워 준 점이다.
이러한 의의와 특징을 가진 새 통일방안은 기존 통일방안과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3단계 통일방안」에다 통일의 철학, 통일의 원칙, 통일의 미래상 등을 보완한 것으로서, 점진적·단계적으로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통일을 이루어 나간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은 그 내용의 특징을 함축하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또는 「공동체통일방안」이라는 상징적 의미의 약칭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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