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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고재종 6집·장석남 4집 주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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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한 문학평론가는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고 말한 바 있다.

자연 파괴로 자연과 함께 살며 형성된 정신적 자질도 파괴되가고 있다는 지적일 수 있다. 해서 이제 돌아갈 고향, 자연이 없는데도 지극히 피상적.추상적으로 그런 세계를 다루며 마치 신선.도사 다 된 체 하는 시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최근 나온 고재종(44).장석남(36)씨의 시집은 진실로 서럽고도 밝게 자연을 다루며 서정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어느 해 가을 저곳에서/머리에 수건을 쓰고, 볼이 달아오를 대로 올라선/그 능금알을 따는 처녀들과/그것을 한 광주리씩 들어올리는/먹구릿빛 팔뚝의 사내들을 훔쳐본 적이 있다//나는 아직도 저 능금밭에 들려거든/두근두근 숨을 죽이고, 콩당콩당 숨을 되살리며/개구멍을 뚫는 뻘때추니라야 한다고 생각한다//그토록 익을 대로 익은 빛깔이/그토록 견딜 수 없는 향기로 퍼지는/저 풍성한 축제를 누가 방자하게 바라볼 것인가" ( '능금밭 앞을 서성이다' 중)

전남 담양의 농촌에서 살고 있는 고씨의 여섯번째 시집 『그 때 휘파람새가 울었다』(시와시학사.5천원)에는 자연의 '풍성한 축제' 로 가득하다.

그 젊은 축제를 방자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숨을 죽이며 되살리며 동참하고 있다. 그런 그의 시로해서 우리의 자연은 온전하게, 싱그럽게 우리의 마음 속으로 되살아 온다.

매화도 피어나고 능금도 익어가는 그 찬란하고 순한 생명의 고리에 우리를 편안하게 얹어놓는다. "이 저녁, 집집마다에선/봄나물 국이 쩔쩔 끓을 것이라면/이 봄이 저리 환해진들 또 어쩌겠는가" ( '꽃 터져 물 풀리자' 중)라며 죄없이, 욕심없이 환한 봄날 서정의 식탁으로 고씨는 우리들을 초대한다.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잘못 꾼 꿈이 있었나□//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殘像)들/지나가는 바람이 잠시/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그런 길이었긴 하여도//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장씨의 네번째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5천원)에는 위 표제시 전문에서 보는 것 같이 상실의 아픔이 아련한 꽃그늘처럼 번진다. 서울에 살아 자연과 일정한 거리를 지니고 있어서 그런가. 그가 즐겨 그리는 자연에는 지나간 사랑.추억들이 애처럽다.

"이 자리는 본래 연못이었어/다 메워버렸군/버들 몇 그루만 서서/없어진 물 위를 들여다 보고 있네/물 위에 빛나던 파문(波紋)들 모아/품 안으로 조심스레 가둔 채//어머니," ( '연못이 있던 자리' 전문)자신을 비출 연못을 잃어버린 버드나무 처럼 자연은 우리의 추억의 파문들을 쓸쓸하게 실어나르고 있다.

그럼에도 모성, 자연 회귀본능만은 놓치지 않고 정직하게 반추케하고 있어 그의 시는 쓸쓸한 아름다움을 주면서도 포근하다. 이렇게 아직 자연에 묻혀, 자연을 추억하며 자연과 함께 하는 젊은 서정시인들이 있어 우리시의 세계는 푸르고 깊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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