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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상록의 역사 가꾸는 유달영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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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무궁화 선비' 성천(星泉)유달영 선생은 올해 91세이시다. 얼굴은 맑고 허리는 꼿꼿하며 목소리 또한 젊은이 못지 않았다. 과연 '무궁(無窮)청년' 이시다.

몇 년 전부터 선생의 사회적 일과는 비둘기, 참새와의 조례(朝禮)로 시작된다.

선생이 여의도의 자택과 인근 체육관을 오가는 길, 동이 튼 얼마 후인 여름이면 여섯 시 겨울이면 여덟시에 비둘기와 참새떼가 선생이 나눠주는 모이를 기다린다.

비둘기들은 선생의 어깨 위에 내려 앉은 지 오래이나, 참새들은 아직 발치에서 귀엽게 눈치를 살피고 있다. 선생의 올해 '참새 제자들' 교육 목표는 그들도 어깨나 머리 위에 스스럼없이 앉게 하는 것이다. 구순의 개결만이 가능할 무공덕행(無功德行)이요, 낙도(樂道)다.

성천이 꼭 10년 전 자신의 아호를 따 세운 성천문화재단 이사장실에서 그는 한 쪽 창가를 채운 불상들을 가리키며 "요즘 불상을 모으는 데 열심" 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자신은 기독교인이지만 "불심을 드러내는 불상은 착한 마음을 기르기 때문에 집에도 많이 갖다 놓았다" 고 했다.

불심은 커녕 방탕으로 찌든 검은 낯빛을 무릎쓰고 선생에게 우선 건강교육을 청했다.

성천은 정정하기 이를 데 없어 해마다 한 차례씩 해외 문화답사에 나선다. 성천재단의 부설 교육기관인 성천아카데미 교육생과 함께다.

98년엔 엔볜과 백두산 일대, 99년엔 동구권, 지난해는 북구권을 다녀왔다. 오는 5월엔 중국의 돈황, 서안 지역을 들러 볼 예정이다. 들르는 곳마다 챙긴 작은 돌멩이들이 탁자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젖동냥으로 살아남아 어릴 때 굉장히 약질이었다" 던 선생은 건강 비결을 비교적 길게 설명했다.

3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실행한 이 비결을 하루치로 요약하면

▶7천보 걷기(전에는 1만보, 만보계를 차고 다닌다)

▶머리.목.눈 마사지 70회

▶허리운동 1백회

▶식사는 (아침)찰떡 한 조각, 우유 한 컵, 계란 한 개, 야채즙 (점심)분식 (저녁)가족과 함께 된장.채소 위주-채소는 20~30가지

▶일정한 시간에 화장실 가기

▶소금물로 코청소다. 육체는 정밀기계이기 때문에 관리를 소홀히 하면 반드시 고장이 난다는 게 지론이다.

선생의 지나온 날을 몇 줄의 글로 소개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농학자로 출발했으나 성천 스스로 어느 글에서 토로했듯이 역사의 부름에 따라 진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투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궤적을 알려면 서점에 가서 그의 저서들을 찾아 볼 일이다. 그러나 성천의 일생 업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육자일 것이다.

평생을 학교 강단과 대소 야외 강단에 선 그는 지지난주에도 육사 생도들에게 역사관을 주제로 그 연세에 무려 3시간에 걸친 강의를 했다. 수시로 성천아카데미 강단에 섬은 물론이다.

성천문화재단은 성천이 수원 근교에서 운영하는 1만5천여평 규모의 '평화농장' 중 1만여평이 고속도로 나들목 부지로 수용되면서 나온 보상금으로 91년 설립됐다.

우리 역사가 나아가는데 보탬이 될 요량으로 ▶문화교육사업 수행 ▶문화민주주의 구현 ▶우리 문화 정체성 확립을 취지로 삼고 고전, 생활문화, 미래학 세가지로 나눠 교육 중이다.

-재단을 설립할 때 이웃에 사시는 시인 구상 선생과 상의했다고 들었습니다.

"구상 선생과는 형제처럼 지내는데 뜻밖에 생긴 큰 돈을 무엇에 쓸까 상의했더니 노산 이은상 선생의 유지를 소개해요. 노산이 남한산성 밑에 '민족의 도장' 이라는 사회교육기관을 설립하려고 동분서주하다 그만 돌아가셨다는 건 데 '잘 됐다' 내가 그 뜻을 이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성천아카데미는 수준 높은 지도자 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요. "

성천은 일제시대부터 농촌운동에 삶의 한 뜻을 세우고 진력해왔다. 소설 '상록수' 의 실제 여주인공으로 유명한 최용신이 바로 그와 함께 일했다.

심훈은 최용신이 26세 때 사망한 기사를 보고 그녀의 삶을 소설화했고 성천은 최용신 전기를 쓴 게 화가 돼 형무소 생활을 했다.

그는 농민들에게 '농사를 열심히 지으라고 입으로 떠드는 것보다 자신도 직접 지어야 농민들에게 힘이 되겠다 싶어' 60대초 수원근교의 산비탈을 개간해 평화농장을 만들었다. 이것이 이 일대가 딸기.포도 단지, 목장지대로서의 모태다.

현재 남은 5천여평은 시가 50억원에 달하는데 성천은 이를 사후에 재단에 기부하는 유증(遺贈)절차를 모두 밟았다.

-여쭙기 죄송합니다만 그 큰 돈을 모두 기증하는데 대해 가족들이 섭섭해 하지는 않았습니까.

"수원 농장은 내 아내의 힘으로 개간했어요. 아내가 땅을 일구고 나무를 심고 물을 길어 키웠지요. 늘 말없이 내 뜻을 따랐지요. 그런데 91년에 상금 전부로 교육 도량을 세우려고 하니까 비로소 한마디 하기를 그 돈 중 일부를 달라고 해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호의호식 못하며 자식 넷을 키워 시집 장가 보냈지만 그 자식들에게 궤짝 하나 제대로 장만해주지 못한게 한이랍디다. 그래 얼마간 떼어줬더니 장롱값 삼아 조금씩 나눠줬다고 하더군요. 자식들은 즐겁게 내 뜻을 따라 고맙고요. "

성천보다 두살 연상인 아내는 오래 전부터 치매에 걸려 있다. 그는 역설적으로 아내의 병환을 고맙게 여긴다고 한다.

"남편 노릇 못한 사람에게 늘그막에나마 아내를 간호하는 제대로된 남편 노릇하게 하는 게 고맙고, 일생동안 어머니를 부리기만 한 자식들에게 이제를 효도를 하도록 병석에 누웠으니 그것도 고맙다. " 는 것이다.

성천의 네 자식들은 모두 아버지의 길을 따라 서울대 농대를 나왔다. 성천의 스승은 그의 글을 통해 잘 알려졌다시피 김교신 선생이다.

양정고보 5년간 성천을 가르킨 김교신은 함석헌과 함께 '한국인의 참 나' 를 찾자는 사상가 다석 유영모의 제자이기도 하다. 함석헌과 김교신은 모두 올해 탄생 1백주년을 맞았다.

성천은 그 두사람과 함께 일제하에서 한국인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성서조선' 사건으로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여 영어의 몸이 됐다. 성천은 김교신의 가르침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고 그 바탕 위에서 자신의 개결한 뜻을 펼쳐 왔다.

-사제지간의 뜻이 많이 퇴색한 이런 황량한 시대에 선생님은 스스로 스승의 본을 보이면서 또한 옛 스승의 뜻을 받들고 있습니다. 참 스승의 존재란 어떤 것입니까.

"스승은 정신의 어버이입니다. 육체의 어버이는 부모님이지만 인간은 정신의 부모가 육체의 부모보다 더 소중할 수 있어요. 참된 스승은 제자에게 좋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줍니다. 어떻게 살 것이냐를 가르치는 존재가 스승이고 그 가르침을 받들고 따르는 것이 제자입니다. 기사 조치훈이 여섯살 때 일본의 기타니 문하에 들어가 마침내 정상에 오르자 기자들이 조치훈에게 '그동안 스승과 얼마나 많이 바둑을 뒀느냐' 고 물었드래요. 수도 없이 뒀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한 물음이었는데 조치훈은 딱 두 번 둬봤다고 대답했다지요. 역시 위대한 스승은 '너는 반드시 무엇이 될 수 있다' 라는 신념의 가능성을 심어주는 것이지요. 김교신 선생은 45세에 돌아가셨지만 그 분의 애국하는 가르침을 내가 후학들에게 그대로 전수하고 있으니 그 분은 지금의 학생들에게도 스승인 것입니다. "

-다석 선생, 함석헌 같은 분의 사상의 참 뜻은 무엇입니까.

"그 분들은 한마디로 애국자였어요. 사람이니까 사람답게 살자는 것이었고 그 분들은 그것을 철저하게 실천했어요. 그분들은 이기주의를 가장 싫어했습니다. "

성천의 첫 딸은 1956년에 김교신의 장남과 결혼했다. 김교신은 해방을 넉달 앞두고 함흥에서 숨졌다. (성천은 김교신이 발진티푸스로 숨지기 전날까지 스승과 한 방을 같이 썼다. )아홉명의 식구가 딸린 김교신의 가세가 '거지꼴' 로 변하자 성천의 장녀는 아버지의 뜻도 묻지 않고 혼인을 강행했다.

당시 미국 코네티컷대학의 교환교수에서 돌아온 성천은 딸의 결심을 듣고 말렸다고 한다. "나는 스승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지만 너까지 왜 그러느냐" 는 심정이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상을 탈 만큼 장래가 촉망받던 딸이었다. 그 딸은 결혼 후 시할머니를 비롯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도미했지만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자식들을 키웠다. 칠순의 그녀는 현재 미국의 유명한 화장품 회사의 연구실장으로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성천은 사상계 등에 연재한 인생론으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감명을 줬고 그 글을 모은 책이 여러 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 자신의 좌우명은 '호학위공(好學爲公)이다. 열심히 공부해 공공에 봉사하자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넥타이를 매지 않고 한국보이스카우트를 창설한 주인공답게 성천은 타이슬링을 하고 다닌다.

인터뷰 후 사무실 현관을 나설 때 경비원의 인사에 그는 거수로 답례했다.

이헌익 (문화.스포츠 담당 에디터)

<유달영 박사 약력>

▶1911년 경기도 이천 출생

▶33년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36년 수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졸업,개성 호수돈여고보 교사 부임

▶42년 ‘성서조선’사건으로 김교신·함석헌·송두용 등과 서대문형무소 투옥

▶46년 서울농대 교수 취임

▶61년 재건국민운동본부장 취임

▶62년 전국재해대책위원회 창립,위원장 취임

▶67년 대한가족협회 회장 취임

▶73년 서울대교수협의회장,한국국민윤리연구회장 피선

▶82년 덴마크 단네보르 기사훈장 수여

▶85년 한국무궁화연구회 창립,회장 취임

▶86년 범민족올림픽추진중앙회 고문 추대

▶91년 성천문화재단 설립,이사장 취임

▶95년 대한적십자 인도장 금장 수상

▶97년 유한재단 제2회 유일한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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