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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바퀴 시대의 한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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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0여년 전에 베트남의 한 호텔 라운지에 앉아 있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나라 가수가 우리 일행을 보자 대뜸 우리 대중가요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런 놀라움은 그 뒤 몽골에서 다시 경험했다. 유목민 가족이 사는 '겔' 안에 우리나라 여성 탤런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요즘 중국이나 캄보디아.싱가포르 등 아시아 어느 나라를 가건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켜면 우리 연속극이 방영되는 것을 흔히 본다.

국제 간의 문화유통에서 극히 이례적인 것이 이 한류 현상이다. 강대국의 문화가 약소국으로 흘러들어가 위세를 떨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요한 갈퉁이라는 학자는 국제 간의 문화 흐름을 자전거 바퀴를 들어 설명한 바 있다. 문화란 자전거 바퀴가 살을 통해 중앙에서 주변으로 힘을 전달하듯이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수직적으로 흐르지만, 자전거 바퀴가 테를 따라 힘을 전달하지 않듯이 주변부끼리는 유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불평등한 문화 흐름을 그는 구조적 제국주의라고 정의했다. 90년대 들어 떠오른 한류 현상은 갈퉁의 그런 주장을 보기 좋게 뒤엎었다. 한류 현상은 문화가 반드시 중심부에서 주변부로만 흐르는 것이 아님을 실증하고 있다.

그렇다고 갈퉁의 이론 자체가 오류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암묵적으로 전제한 환경요인이 달라져 이변이 일어났을 뿐이다. 갈퉁이 상정한 것은 냉전적 세계체제였다. 그 체제에서 문화는 자본주의 블록에서는 미국의 것이, 공산주의 블록에서는 소련의 것이 주변부로 수직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무너지자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 지역 국가 간에 경제 교류가 활발해졌고, 세계체제의 이런 변화가 주변부에서 주변부로의 수평적인 문화 흐름을 가능하게 했다. 세계체제가 자전거 바퀴 시대에서, 바퀴와 가로대(橫軸)가 아울러 작동하는 기차 바퀴 시대로 바뀌자 문화영역에서도 중심부에서 주변부로의 수직적 흐름과 주변부 지역국가 간의 수평적 흐름이 공존하게 된 셈이다.

국내에서 한류 현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두 가지 주장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한류 현상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이 두 주장이 다 기차 바퀴 시대의 정신이나 성격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첫째, 우리 대중문화가 아시아의 문화시장에서 일방적인 지위를 더욱 강화하는 것은 기차 바퀴 시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국제 간의 문화 흐름은 되도록 쌍방향적이라야 그 생명이 길게 마련이다. 기차 바퀴 시대에 한류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아시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수입하는 데 더욱 능동적이어야 한다.

둘째, 국제 간의 문화 흐름에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차 바퀴 시대의 성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고 할 수 있다. 한.중 간의 경제교류에 정경분리가 철칙이 돼 있듯이 아시아 국가 간의 문화 흐름에도 이념의 문제, 정치의 문제가 수면 아래 잠복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섣불리 끼어들었다가는 뜻밖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또한 문화에 정부가 간여하면 문화의 성격 자체가 왜곡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한류 현상의 직접적인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산업계가 우리의 문화 인프라에 투자해 문화기반을 탄탄하게 다지는 우회적 방법을 모색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두 주장을 접할 때마다 '주는 것이 얻는 것이요 놔두는 것이 돕는 것'이라는 노자(老子)의 반어법이 떠오른다.

김민환 고려대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