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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범어사 간장 비결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땡그랑, 땡그랑…. "

지난 12일 오전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梵魚寺). 금정산 자락을 휘감는 바람에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대웅전과 극락전.지장전에서 새어 나오는 독경소리는 겨울바람에 금세 흩어졌다. 입춘이 1주일 지났지만 바람이 매서운지 신도들의 발길이 뜸했다.

그러나 오전 10시쯤부터 원주실(院住室)뒤 장독대 부근에서 행자승과 여신도 10여 명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날은 범어사가 장을 담그는 날이기 때문이다. 광주리에 수북한 소금위로 연신 물이 흘러내렸다.

바구니 틈새로 '졸졸졸' 흘러 내리는 소금물 소리가 깊은 산 개울물 소리만큼 청아했다. 물은 대웅전 뒤 바위틈에서는 나오는 석간수를 사용한다.

한 켠에서 한 신도가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메주를 큰 독에 차곡차곡 넣고있었다.

지난해 음력 10월 승방 보살들이 5일간 쑤어 띄운 메주를 지난 11일 깨끗히 씻어 물기를 말려 놓은 것들이다.

어른 가슴 높이만한 장독(20말 들이)내부는 하루 전날 한지 불로 깨끗하게 소독됐다. 메주가 가득찬 장독에 소금물을 붓는 일은 행자승이 맡았다.

손놀림이 능숙한 행자 월제(月濟)는 "어머니가 장담그던 모습이 문득 생각난다" 고 말했다.

소금물이 가득찬 독에 참숯과 붉은 고추가 넣어진 뒤 메주가 떠오르지 않도록 대나무가 걸쳐졌다. 벌레가 독에 들어가지 못하게 망사천으로 주둥이를 씌우자 장담그기는 마무리됐다.

행자 5명과 여신도 10명이 콩 11가마로 만든 메주로 장 담그기를 끝내자 점심 때가 지났다.

8년째 범어사 장을 담가왔다는 박정윤(朴正允.68)할머니는 "물과 메주가 좋아 범어사 장맛은 일품이라요. 장이 좋으니 음식 맛도 좋다 아인교" 라며 자랑이 대단했다.

음력 정월은 전래대로 장 담그는 철이다. 속세에서도 장담그는 일로 바쁘고 산사에서도 장 담그기는 큰 불사(佛事)가운데 하나다.

경남 합천군 해인사도 12일 장을 담갔고 승가대학이 있는 경북 청도군 운문사는 지난달 31일 장을 만들었다.

신라 고찰인 범어사의 간장은 음력 5월에 모습을 드러낸다. 간장이 되기까지 범어사 장독은 화창한 봄날 낮에는 뚜껑이 열리고 밤에는 닫히기를 수십번 거듭한다.

간장을 빼낸 메주 덩어리를 다시 으깬 뒤 소금과 버무려 4개월 이상 발효하면 된장이 된다.

범어사의 장은 본절과 10여 곳의 암자에 상주하는 50여명의 스님, 불자들에게 공급된다. 범어사 스님들은 이 된장으로 떡도 만들어 먹는다.

부추.미나리 등 10여 가지 채소를 잘게 썰어 된장에 버무려 만드는 된장떡은 향긋한 채소와 짭짤한 장맛이 어우려져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철 별미로 인기다.

신도가 2만명이 넘는 범어사의 장은 신자들이 많이 찾는 4월 초파일과 3월 보름 보살계 때 가장 많이 소비된다.

1백회를 넘긴 범어사 보살계(불자들이 실천해야 하는 10가지 계를 받는 산림법회)에는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하기 때문이다.

신라 흥덕왕 때 의상대사가 세운 범어사의 살림을 총괄하는 원주실 초안(超眼)스님은 "산사의 음식에는 정신을 맑게하고 총명하게 만드는 지혜식과 도를 이루기 위한 수행식이 있다" 며 "이들 음식에 전통 장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며 된장불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범어사 주지 성오(性悟)스님은 "간장과 된장의 곰삭은 맛은 기다림과 안으로 깊어져야 하는 종교인의 마음 가짐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며 "인스턴트 된장을 먹으면 사람의 기질도 가벼워 진다" 고 말했다.

범어사=강진권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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