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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점 번창, 넘쳐나는 일본인 … 조선인들 어디 있는지 의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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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부랴부랴 갑판으로 올라갔고 제물포의 경탄할 만한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내 평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해안선과 항구를 이루는 크고 작은 섬들을 따라 아기자기한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었고 항구 전체를 사슴동산처럼 완벽하게 감싸 안은 가운데 마침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1888년 프랑스의 민속학자 샤를 바라(C.L.Varat)의 제물포 원경 예찬이다.

‘중국인 거주지는 수려한 관아와 길드, 공회당, 번창하는 상점들로 이어지고 있는데 폭죽소리와 징, 북소리로 분주하고 시끄러워 보였다. 확실히 무역에서는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일본인 거주지는 인구가 더 많고 넓었으며 과시적인 데가 있었다. 그들의 총영사관은 사절단을 위압하기에 충분했다. …한국인은 제물포 어디에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사실 난 그들을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중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I.B.Bishop· 1832~1904) 여사는 생생한 묘사와 예리한 관찰로 정평이 나 있다. 청일전쟁 무렵 다시 제물포를 찾았을 때, 그 번창했던 중국인 거리는 ‘중세 페스트 오염 지역만큼이나 궤멸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인 거리는 최상의 활기가 넘쳤다. 은행 지점들과 거류지 사무소, 일본 경찰서, 병원, 소학교, 호텔·술집들로 번화했다.

1882년 12월 8일, 조선 외교고문으로 초빙된 독일인 묄렌도르프(穆麟德·1847~1901)가 처음 보았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이방인들과 근대문물이 물 밀듯 들어오면서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제물포(濟物浦)라는 이름에 걸맞게 근대 문물이 들고 나는 포구가 된 것이다.

각국 조계지에는 많은 외국인이 모여 살게 되었다. 자치의회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1891년 8월, 마침내 제물포구락부(사진)가 만들어졌다. 구락부(俱樂部)는 클럽(Club)의 일본식 가차(假借)다. 현재까지 보존돼 있는 건물은 나중에 독립문 설계를 맡게 되는 건축가 사바친의 초기 작품으로 사교실·도서실·당구대에다 야외 테니스 코트까지 갖춘 사교 클럽이었다. 클럽에서는 보름마다 무도회가 열렸는데 고종의 시의(侍醫) 분쉬(R.Wunsch) 박사는 제물포에 입항한 다음 날, 제물포클럽에 가서 이곳 주요 인사들과 만난다.

영국 영사, 프랑스 세관장, 독일 세창양행 대리인 등 50여 명이나 되었다. 분쉬는 서울에서 살면서도 이따금 제물포클럽을 찾아 밤을 새우곤 했다(『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제물포구락부는 현재 영상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영국·러시아·이탈리아 등 각국 초청 행사를 열어 국제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김종록 객원기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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