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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경험주의의 기수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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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0세기 과학의 급속한 발전은 문명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과학은 인간의 역사를 바꾸는,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됐다.

오늘날 과학이 단순한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어떤 '권위 혹은 권력' 의 상징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20세기 전반부의 과학 발전을 경이적인 눈으로 지켜본 사상가들은 과학을 객관성과 합리성을 표방한 모더니즘의 대변자로 간주하고,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의 방법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였다.

즉 과학은 객관적인 관찰과 실험이라는 확실한 경험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며, 어떠한 이론적 주장도 경험적 자료들이 뒷받침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검증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이 있기에 과학이 종교나 문학 등과 구분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성공을 이뤄낸 것이라고 본다.

이는 1920년대 중반 오스트리아 빈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인 모리츠 슐리크나 루돌프 카르나프 등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과학철학자 노우드 러셀 핸슨은 58년 그의 저서 『발견의 패턴』에서 지각 경험이 이론이나 개념 혹은 배경지식에 의존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관찰이 이론과 상관없이 객관적이라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그는 같은 X-선 사진을 보는 의사와 환자의 경우처럼, 두 관찰자가 동일한 대상을 보더라도 경험한 내용은 동일하지 않다고 하면서 관찰이 오히려 이론에 의존적임을 강조하였다.

그의 유명한 말 "본다는 것은 안구(眼球)운동 이상의 행위이다" 라는 문구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토머스 쿤은 핸슨이 지적한 이러한 상황이 보다 근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그의 명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그는 과학의 이론적 탐구와 실천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모태(母胎)적 토양과 같은 것으로서 '패러다임' 이란 것을 제시했다.

그에게 패러다임이란 학문내적인 요소들, 즉 개념적.도구적.방법론적 요소들만이 아니라 학문외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교육.문화.사회적인 전통이나 세계에 대한 개개인의 암묵적인 믿음과 직관들, 그리고 가치관이나 형이상학적 믿음 모두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쿤에게 존재하는 상대주의적 요소는 독일의 과학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에 오면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그는 도발적인 저서 '방법에의 도전 : 애너키스트적인 지식론 개요' 에서 과학이 고대 신화나 점성술, 종교와 같은 다른 지식 분야에 대해 지적인 우월성이나 권위를 지니지 않는다고 본다.

즉 과학에서 이성 혹은 합리성의 존재를 거부한다. 그의 이론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하는 해체 논리의 선구적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중원 <서울시립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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