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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친구 운보 영전에] 청강 김영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내가 운보 인형(仁兄)을 처음 만나 알게 된 것은 1929년께의 일이다. 그 때 운보형은 16세이고 나는 19세였다. 그림 공부를 하겠다고 내 아버님(海岡)을 뵈러 왔을 때였다.

그 때 운보형과 맺은 인연이 어언 70여년을 이어온 것이다.

운보형은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에게 입문하여 화도(畵道)에 정진했다. 이후 그는 선전(鮮展)에 입선.특선을 여러번 하여 그의 명성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서 해방되고 국전(國展)이 생겼으나 이 국전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춘곡(春谷) 고희동씨가 운보는 이당 계통이고, 나는 해강 파라고 하여 국전에 등용을 시켜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 동양화단의 중견작가들은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함께 활동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 단체가 백양회(白陽會)고 그 첫 회장을 운보형이 맡았다.

운보형은 원래 화명(號)을 '운포(雲圃)' 라고 써 왔으나 일제에서 해방됐다는 뜻에서 '圃' 자의 테두리 '口' 자를 떼어버리고 '운보(雲甫)' 로 고쳐 쓴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60대 초반 필자가 백양회를 맡던 당시 대만과 홍콩에서 전시회를 열어 호평받던 일도 기억난다.

당시 현지 평단에서는 "한국 작가의 작품이 중국 화풍도 아니고 일본 화풍과도 다른 한국민족의 품성과 경향을 잘 나타낸 예술" 이라고 크게 칭찬했다. 그 때 운보형은 수백마리의 게를 그렸고 나는 새우떼를 그려 출품했다.

운보형은 같은 화가인 우향 박래현과 결혼한 뒤 새 반려자의 도움으로 언어소통이 나아지면서 예술과 사회 활동에 보다 큰 진전을 보았다.

운보형은 밤에 잘 때는 그가 부인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자기 의사를 전달한다고 내게 말해주기도 했다.

원래 성격이 소탈하고 순박한 그는 우리들 같은 작가끼리 농담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이 그림 이야기에 미치면 일사천리 식으로 떠들어대곤 하였다.

이당을 사사했지만 원래 활달하고 대담한 성격인 그는 이당의 연미(軟美)한 필치와는 달리 힘차고 대담한 필치로 그 나름의 예술을 이룩했다.

이제 운보형은 우리 화단에 큰 업적을 세우고 한국 미술사에 빛나는 예술을 완성하고 유명을 달리하였다.

이제 먼저 가신 저 세상에서 고이 잠드소서.

청강 김영기(晴江 金永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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