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 안전 담보로 “경비 절감” 자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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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 사장의 미국 의회 청문회 출석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하려던 도요타자동차가 암초를 만났다. 미국 교통당국을 잘 요리해 리콜을 줄이고 각종 안전장치 도입을 늦춰 수억 달러를 아꼈다고 자화자찬한 내부 문건이 드러나면서다.

미국 소비자 입장에서 본다면 문건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2007년 급발진 사고를 일으킨 캠리와 렉서스 ES350 리콜을 줄여 경비를 절감한 것을 ‘도요타와 자동차 산업의 7가지 승리’의 하나로 열거하고 있다. 미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애초 2007년 3월 캠리와 렉서스의 바닥 매트가 가속 페달을 눌러 급발진 사고가 난다는 소비자 불만을 도요타에 제기했다. 그러나 도요타는 “매트를 제대로 장착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버텼다. 결국 NHTSA가 600대의 렉서스 차량을 조사해 증거를 제시하자 도요타는 NHTSA와 협상을 벌여 6개월 뒤인 9월에 가서야 5만5000대를 리콜했다.

문건은 안전장치 의무화나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늦춘 것도 ‘도요타의 승리’로 평가했다. 고객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그동안의 광고와는 정반대였던 셈이다.

문건을 만든 시기도 좋지 않다. 워싱턴에 있는 도요타 북미법인 본사는 이를 2009년 7월 만든 것으로 돼 있다. 이는 캘리포니아주 고속도로 순찰대원이 렉서스 ES350을 타고 가다 급발진으로 일가족 세 명과 함께 숨진 사고가 일어나기 불과 한 달 전이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도요타의 안전 불감증이 인명 희생을 불렀다는 비난 여론이 달아오르고 있다. 북미법인 이나바 요시미 사장의 이름이 표지에 기입된 것도 논란거리다. 이나바 사장이 직접 관여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이런 문건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개연성은 있다. 그는 24일(현지시간) 미 하원 감독 및 정부개혁 위원회 청문회에 도요다 사장과 함께 참석할 예정이다.

문건이 폭로되자 즉각 성명을 내 “미주지사 한 곳에서 나온 정체 불명의 내부 문건 하나로 도요타의 고객 우선주의 경영방침을 싸잡아 폄하하는 건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물밑에선 의회를 상대로 치열한 로비를 벌이고 있다. 이미 5만 건의 문서를 의회에 제공했고 의원과 보좌관을 상대로 도요타 기술진이 직접 133번 브리핑을 했다. 22일엔 100명 이상의 도요타 딜러가 워싱턴으로 날아가 의원을 ‘각개격파’할 계획이다. 도요타 공장과 지사를 유치한 주의 주지사도 로비에 가세했다.

그러나 문건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감독 및 정부개혁 위원회 공화당 간사인 대럴 아이사 의원의 대변인 커트 바델라는 “(이번 문건은) 도요타가 이익에 집착해 규제당국이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도록 로비를 벌인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문건을 청문회 이슈로 부각할 것임을 예고했다. 도요다 사장의 전략도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애초 그는 미 의회에 출석해 자사 입장을 적극적으로 설명할 계획이었다. 안전장치 보강에 대한 복안도 제시해 위기를 정면 돌파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문건 파문으로 설명은커녕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려야 할 가능성이 커졌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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