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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법 폐지" 여당 형법개정안 적용해보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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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형법 개정을 통해 보완하는 당론을 확정한 것을 계기로 국민 사이에 보안법 개폐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국가안보는 건강과 마찬가지로 한번 잃어버리면 회복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보안법이란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체제나 국가 질서를 뒤흔들려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어떤 법률에든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보안법과 같은 '안보형사법'은 정권의 유지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반드시 북한만을 겨냥한 법률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을 막는 장치는 있어야 한다.

만약 중대한 국가안보 침해 사범이 입법 과정의 허점 때문에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 온다면 새로운 법률이 탄생할 때까지 우리의 안보는 중대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본지는 열린우리당 방안대로 할 경우 몇몇 국가 질서 교란행위를 처벌하거나 예방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점검했다. 이를 위해 20여명의 현직 판사와 검사, 동국대 법대 김상겸 교수, 김원치.박준선 변호사 등 학자와 재야 법조인,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과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 등에게 자문했다.

평양 노동당 행사 허가 안받고 참여, 처벌 어려움

1. 국내 인사가 평양에서 열린 북한 노동당 행사에 허가를 받지 않고 참가하더라도 열린우리당의 형법 개정안으로는 처벌이 어렵게 된다. 지금까지 공안 당국은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잠입하거나 탈출한 자는 처벌한다"는 보안법(잠입.탈출) 조항에 근거해 관련자들을 사법처리했다.

고(故)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씨 등이 처벌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보안법상 잠입.탈출을 비롯해 찬양.고무, 이적 표현물 제작.배포, 회합.통신죄 등이 모두 삭제되면 형사처벌의 근거가 없어진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나라 인사들이 북한에 들어가 노동당 창당 기념일을 포함해 각종 정치 행사 등에 참석하더라도 북한 측 인사들과 남한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시키기 위해 논의했다는 사실 등이 입증되지 않는 한 처벌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다만 남북교류협력법상 '허가받지 않은 방북' 조항으로 처벌할 수 있다. 남북교류협력법(9조)은 "남한과 북한의 주민이 남한과 북한을 왕래하고자 할 때는 통일부 장관이 발급한 증명서를 소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법처리된 사례는 극히 드물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서울시 등 지자체 독립공화국 선언, 처벌 불가

2.서울시가 현 정부의 수도 이전 방침 등에 반발, '서울 공화국'으로의 독립을 선포해도 형법 개정안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

열린우리당이 북한을 내란목적 단체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인 형법 87조2항을 새로 만들면서 "국토를 참절(불법적으로 점유)하거나 국헌을 문란케 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로 내란목적 단체를 규정했다. 즉 서울시의 공화국 선포는 국토를 참절하고 국헌을 문란케 한 행위에 해당하지만 폭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내란목적 단체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의 공화국 선포 행위는 보안법상 정부 참칭(스스로 정부라 일컬음) 등 반국가단체 구성죄에 해당된다. 열린우리당 측은 "공화국을 선포한다는 것은 자체 보호 능력을 갖춘다는 의미로 경찰 또는 군대나 적어도 10~20명의 경비원이라도 갖췄을 것"이라며 "따라서 그 자체로 폭동의 개념에 해당돼 내란목적단체 조직죄로 처벌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북한공작원이 국내서 간첩행위, 처벌 어려움

3.공작원이 국내에 들어와 정부 및 주요 단체의 기밀을 수집해 정기적으로 북한 노동당에 보고한 경우 열린우리당 안으로는 처벌 여부가 불분명하다. 보안법에서는 북한을 간첩죄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외국에 한정하는 형법상 간첩죄 대상으로 볼 수 없어 간첩죄 적용이 어렵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남한에 내려와 정부 기밀을 빼내갔다면 내란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내란죄로 처벌하면 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간첩 행위를 모두 내란 목적이 수반되는 경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동국대 김상겸 교수는 "법 질서 파괴라는 구체적인 내란 획책 행위가 아니라면 정보를 빼내 유출한다고 내란 예비 음모죄를 적용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북한 공작원이 우리나라의 군사기밀을 빼내기 위해 활동한 경우에는 군사기밀보호법으로 처벌이 가능하다. 또 이 같은 군사기밀을 북한 공작원에게 제공한 내국인도 군사기밀보호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

박재현 기자

북한 공작원과 돈을 주고받거나 은신처 제공, 처벌불가

4.보안법상 금품수수 및 편의제공 죄에 해당하나 열린우리당 안으로는 처벌을 못 한다. 은신처 제공의 경우 공작원이 폭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형법상 범인(내란죄 사범) 도피죄로 처벌할 수 있으나 법 적용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북한 공작원에게서 돈을 받은 경우도 이 돈으로 폭동 준비 활동을 했다는 사실(내란예비 음모)이 전제돼야 한다. 따라서 범민련 남측본부가 북한의 김일성 사상과 적화통일 내용을 담은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비 건립에 쓰라고 돈을 제공한 사건, 송두율씨가 북측에서 수만달러의 활동비를 받은 행위가 모두 처벌 대상에서 제외된다. 폭동을 전제로 금품을 준 것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부인하는 공산당 창당, 처벌 어려움

5.보안법에 따르면 국헌 문란을 목적으로 한 반국가단체에 해당하지만 열린우리당 안으로는 사실상 처벌이 안 된다. 공산당원이 폭력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내란 목적 단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헌법재판소가 위헌 정당이라고 규정하고 정당 해산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활동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북한 노동당과 강령을 같이하는 공산당이라면 내란목적단체 구성죄로 처벌할 수 있다. 1990년 남한 내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겠다며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노맹)'을 만든 박노해.백태웅씨 등의 혐의(반국가단체 구성)도 무죄가 된다. 일부에서는 북한도 내란목적단체에서 빠져나갈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공안검사 출신인 김원치 변호사는 "북한이 무력통일 방침을 버리고 통일전선전술의 확대에 따른 공산주의 국가 통일 방침을 세운다면 북한을 규정할 근거가 없어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북한 노동당 가입, 처벌 가능

6.보안법은 물론 열린우리당의 안도 사법처리 대상으로 정했다. 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가입죄가 형법상 내란목적단체 가입죄로 바뀌는 정도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모여 '북한 노동당 지지 동호회'를 만들어 노동당 강령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동호 회원을 모집하는 경우에는 처벌이 불가능하다. 보안법은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하는 단체는 이적단체로 규정, 이를 구성하거나 가입할 경우 처벌하고 있지만 형법 개정안에는 이런 개념이 없다.

서울 집회서 인공기 흔드는 행위, 처벌 가능

7.현재는 보안법상 찬양고무죄에 해당하나 열린우리당 안으로는 처벌이 안 된다.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열린우리당은 형법상 선전선동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내란을 목적으로 한 행위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처벌 대상이 안 된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열린우리당은 인공기를 흔드는 등의 행위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면 형법상 범죄단체조직죄로도 처벌이 가능하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김일성 주체사상 연구강좌 개설, 처벌 불가

8.형법 개정안으로는 처벌이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단순히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처벌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남한을 무력 통일하자고 기도하기 전에는 처벌 근거가 없다. 일부에서는 찬양고무죄의 폐지 공백이 더 큰 범죄를 방치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서울고법 관계자는 "간첩 행위 같은 큰 범죄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북한 체제를 홍보하는 등의 찬양.고무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이 필요하다"면서 "이런 혐의를 처벌하지 못하게 되면 공안사건 수사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북 공작원이 국내서 내국인 접촉, 처벌 어려움

9.북한 공작원이 국내에 침투해 노동당의 지령을 전파하는 경우도 처벌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공안 당국의 설명이다. 지령 전파가 아니라 단순히 접촉한 것만으로도 현재는 보안법상 잠입탈출 및 회합통신죄에 따라 처벌이 가능하지만 이 조항이 삭제되면서 사법 처리의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측은 "접촉한 목적과 실제 행위에 따라 내란죄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북한군 침투 목격하고도 신고 안해, 처벌 불가

10.북한 군인들이 잠수정을 타고 동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보고도 이를 신고하지 않는 경우 현재는 보안법상 불고지죄에 해당된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불고지죄를 삭제해 처벌 근거가 없다. 열린우리당은 불고지죄를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간주하고 있다. 공안 당국의 수사 관계자가 간첩을 적발하고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는 경우에도 처벌 정도가 크게 달라진다.

현재는 보안법상 특수 직무유기죄에 해당, 무거운 처벌(10년 이하의 징역)을 받도록 돼 있다. 보안법이 폐지되면 형법상 직무 유기(1년 이하의 징역)로 처벌이 훨씬 가벼워진다.

친구와 만나 주체사상 지지 발언, 처벌 불가

11.보안법상 찬양고무죄에 해당하나 열린우리당 안으로는 처벌 대상이 안 된다. 최재천 의원은 "과거 정권이 정권 안보를 위해 보안법을 악용해왔다"면서 "찬양.고무죄를 삭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했다. 최 의원은 "주체사상을 전파하면서 폭동 동조 세력을 규합하는 경우에는 형법상 선전선동죄로 처벌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검찰도 "최근에는 수사당국도 찬양.고무죄는 다른 혐의가 있지 않을 경우 처벌하지 않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일본인이 한국서 기밀 빼내다 적발, 처벌 가능

12.현재 처벌 조항이 없다. 형법상 간첩죄는 적국의 국민이 국내 기밀을 수집 탐지한 경우로만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안을 적용할 경우 처벌할 수 있다. 간첩죄의 대상을 '적국'에서 '외국'으로 확대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는 "로버트 김이 미국에서 간첩죄로 구속된 것처럼 외국인이 국내 기밀을 빼내가는 행위를 처벌하자는 취지"라면서 "북한 공작원을 간첩으로 처벌할 수 있는지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 "북한 공작원을 간첩죄로 처벌하지 못하면서 외국인만 간첩죄로 처벌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형법상 간첩죄보다 내란죄가 더 무거운 처벌이어서 이름은 문제될 게 없다"고 반박했다. 단 군사 기밀의 경우 현재도 외국인에게 군사기밀 보호법을 적용할 수 있다.

김일성 일대기 인터넷 유포, 처벌 불가

13.보안법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情.정황)을 알면서도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등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한 자는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근거해 북한의 주장이 담긴 내용을 전파하는 인터넷 매체와 유포 행위 등에 대한 처벌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 조항 또한 삭제키로 해 처벌이 안 된다.

전진배.천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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