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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육신도 기증하고 떠난 봉사의 삶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인생이 그토록 지루하셨소? 육십도 채우지 않고 이렇게 서둘러 떠나시다니. 혼탁한 것을 싫어해 눈처럼 하얗게 살고 싶어하시던 형. 내 부르는 소리, 가시는 길에 메아리로나마 울렸으면 합니다. 우리, 형 얘기 두고두고 많이 할 겁니다."

폭설로 천지가 온통 백색으로 뒤덮였던 지난 8일. 후배 성우 김기현씨右가 눈물을 흩뿌리며 추모사를 낭독하는 가운데 사흘전 59세를 일기로 별세한 이영달(李濚達)씨의 운구가 영결식장인 서울 고척동 성당을 나섰다.

성당을 나선 그의 운구는 "인간세상에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고 육신마저 기증하고 떠나시오" 라는 金씨의 애도를 뿌리치고 장지(葬地)가 아닌 강남 성모병원으로 향했다.

"안구는 시각장애인에게, 육신은 의학도에게 기증하라" 는 그의 유지에 따라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서였다.

경기고.서울대 상대를 나온 고인은 33년간 소리로 세상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한 원로 성우였다.

한편으론 18년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소설.잡지 등을 녹음하는 작업에 헌신해 왔다.

고인의 빈소가 차려졌던 7일 여의도 성모병원 영안실. 고인이 친동생처럼 여기던 김기현씨와 동료 성우.탤런트들이 소줏잔을 기울이며 그를 기리고 있었다.

▶김기현〓산소호흡기를 낀 형님이 공책에 힘겹게 뭐라고 쓰시는 거야. '누구와의 약속인가' 라고 말이지. 대체 무슨 얘기였을까. 아마 생전에 하던 일을 나더러 계속해 달라는 뜻이겠지. (고인은 임종직전 종이에 간신히 '늑대' 라고 적어 金씨를 불렀다고 한다. 늑대는 얼굴이 길쭉한 金씨의 별명)

▶최봉학〓고지식한 사람. 자기는 자동차도 없이 전철타고 다니면서 불쌍한 사람 돕는데 앞장서더니 임종하면서까지….

▶김기현〓2년 전엔 시각장애인을 위해 석달 동안 소설을 80권이나 녹음했지. 나도 열권 정도 읽었는데 정말 힘들었어. 돌아가시게 된 것도 너무 무리해서야.

▶임채무〓워낙 일을 좋아하셨잖아요. 만화 뽀빠이에 나오는 악당 부르터스의 굵고 불량스런 목소리, MBC 라디오 드라마 '격동 30년' 에 등장한 원로정치인 정일형(鄭一亨)박사의 구수한 음성이 바로 고인의 것이었다.

TV드라마 '사랑과 야망' 에선 주인공 이덕화.남성훈 형제의 죽은 아버지역을 맡아 대사없이 영정사진만으로 네번 정도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배님은 일에 자부심을 갖고 항상 신명나게 연기했다" 고 성우 김영훈씨는 전했다.

고인의 삶은 드라마 밖에서 더욱 빛났다. 연기 일생에서 늘 조연(助演)이었던 그는 실생활에서도 남을 돕는 조역이고자 했다.

그는 83년 시각장애인을 위해 '소리잡지' 창간작업에 참여한 뒤 녹음을 통해 봉사하면서 동료들도 같은 길로 이끌었고, 일반인들에게 도서낭독법을 지도해 6백여명의 자원봉사자를 길러냈다.

소리잡지의 녹음을 무리하게 하다가 98년엔 성대가 마비돼 한동안 '어' 소리밖에 못 내기도 했다.

성우의 생명인 소리를 읽어버린 그해 말엔 덜컥 폐암선고까지 받았다.

산이 너무도 좋아 "88세 되는 해 겨울 설악산의 깨끗한 눈속에 파묻혀 마지막을 맞고 싶다" 던 평소의 소박한 바람도 이루지 못한 채 절망스런 상황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에도 부인 이봉자(李奉子.55)씨에게 "나 암이래. 그런데 암 환자도 기증할 게 없을까?" 라고 담담히 말했다고 한다.

이후 투병생활중엔 시신 및 안구를 기증키로 하면서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18년 봉사활동을 마무리했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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