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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8면

이 책의 기초 사료인 '화랑세기' 는 지금도 진위(眞僞)논쟁의 한가운데 있다.

AD 7세기께 신라시대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는 사다함.김유신.김춘추 등 우두머리 화랑(花郞)인 풍월주(風月主) 32명의 전기를 모은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신라인들의 엽색(獵色)행각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등 실로 파격적인 내용 투성이다.

신라 왕실에는 왕에게 섹스 서비스, 즉 생공(生供)을 하는 여인 집단이 있었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고대사의 주류적 시각을 대표하는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는 이를 정사(正史)로 수용할 수 없다며 그 내용의 신빙성에 진작 의문을 던졌다.

진위논쟁의 계기를 마련한, 1989년 발견된 '화랑세기' 발췌본과 95년 나온 필사본을 두고 노교수는 위작이라 주장했고 저자인 서강대 이종욱 교수는 진본이라 맞섰다. 저자는 이때부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신라사를 정립해 나갔다.

고대사 전공이면서 인류학도 공부한 저자에게 '화랑세기' 는 역사적 상상력의 보고였다.

그의 논지는 '신라.신라인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역사를 보자' 는 것. 언뜻 쉬운 말 같지만, 만약 이런 시각에서 '화랑세기' 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경우 기존의 역사책을 1백80도 수정해야 하는 엄청난 파문이 인다.

아무튼 이교수는 자신의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을 거듭 확인하며 신라사를 '자기의 것' 으로 생생하게 복원해 낸다.

그 전제가 되는 신라여행의 출발선에 '신국(神國)의 도(道)' 가 있다.

신라는 자신을 신의 나라로 일컫고 나름의 제도와 원칙을 갖고 살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랑세기' 에 낯뜨겁게 묘사한 각종 에피소드들은 그 '신국의 도' 를 이해하는 길잡이인 것이다.

'화랑세기' 에 나오는 새로운 사실 가운데 하나가 '마복자(摩腹子)란 존재다. 마(摩)는 문지르다는 뜻으로, 마복자는 배를 맞춘 아들 정도로 해석된다.

신하나 부하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왕이나 상관에게 바쳐 난 아들이다. 1세 풍월주였던 위화랑 조에서부터 이런 이야기는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색공만 해도 그렇다. 사다함의 애인이었던 미실이란 여인은 진흥.진지.진평 3대 황제를 섹스로 섬긴다.

신라는 이를 공급하는 여자들의 계통을 정하였는데, 이들은 진골정통(眞骨正統)이거나 대원신통(大元神通) 출신이었다.

그래도 특이한 점은, 신라는 처첩을 분명히 구분한 일부일처 사회였으며 신분차별은 극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이런 점만을 부각하지는 않는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엄격성을 유지한 골품제의 운용원리와 화랑도의 조직구성, 왕위세습 등에 관한 새롭고 풍부한 자료도 잔뜩 제공한다.

또한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한 칭제건원(稱帝建元.왕을 황제로 칭하며 연호를 사용함)의 전통과 왜국(倭國)과의 국제관계 등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도 많다.

기존 통설을 뒷받침한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는 없거나 다른 내용이다.

이쯤에서 보면 '화랑세기' 의 진위논쟁은 부질없다. '모든 것을 건 모험' 이라며 학자적 양심을 앞세워 주류에 맞서는 이교수의 외로운 투쟁에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됐다. 단 논리전개의 정치(精緻)함은 더욱 요구된다.

특히 실증적 방법론을 고집하며 기존의 실증사학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사실 어느 나라든지 고대사는 사료의 한계로 신화(神話)화하거나 윤색되는 등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이교수의 이번 저작은 조선 이래 굳어져 온 유교적 세계관 등에 갇혀 있는 우리 고대사 연구의 이데올로기를 깨나가는 작업의 좋은 전범이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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