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서 애증까지:고수석의 북·중 돋보기] ⑤ 왕자루이와 김정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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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계획한 장쩌민과 김정일 마지막 편은 다음주로 미루고, 오늘은 중국 왕자루이(王家瑞) 대외연락부장과 김정일 편을 준비했습니다. 최근 2월 8일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난 왕자루이의 얘기에 관심이 더 많을 것 같아서입니다.

김정일은 중국 사람들 가운데 누구를 가장 좋아할까요?
바로 왕자루이입니다. 김정일의 마음을 가장 잘 읽어 주는 중국 사람이지요. 김정일은 왕자루이가 북한에 오면 반드시 그를 만났지요. 그의 온화한 말투와 부드러운 제스처가 김정일에게 많은 호감을 주었기 때문이지요.

중국 공산당 내에서 대외연락부장은 파워가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정치국 중앙서기처 산하에 있는 5명의 부장 (선전부, 조직부, 판공청 대외선전부, 통일전선부) 가운데, 대외연락부장은 정치국 위원이 아닌 부장(판공청, 대외선전부) 가운데 한명이지요. 정치국 위원은 현재 상무위원 9명을 포함해 모두 25명인데 이들이 현재 중국을 통치하고 있지요. 현재 선전부장 류윈산(劉雲山, 1947~ ), 조직부장 리위안차오(李源潮, 1950~ ), 통일전선부장 류옌동(劉延東, 1945~ ) 등은 정치국 위원 25명에 들어가지요. 판공청 주임인 링지화(令計劃, 1955~ )는 비록 정치국 위원은 아니지만 ‘후진타오의 쩡칭홍’으로 불릴 정도로 실세지요. 이들과 달리 왕자루이는 아무런 정치적 직책이 없지요.

대외연락부장의 역할은 국가간 정식 외교보다 ‘黨대黨’ 교류를 맡고 있지요. 그래서 주로 사회주의 국가의 당(黨) 과의 교류를 전담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국가간의 ‘정식 외교’와 함께 ‘당(黨)외교’도 필요하지요. 특히 중국과 북한은 국교 수립 (1946년 10월 6일) 이후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당 우위 외교를 지향해 왔지요. 그래서 김정일은 외교관 냄새가 물신 나는 외교부장 보다는 대외연락부장을 더 선호했지요. 중국도 북한과 관련된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때는 외교부장 보다는 대외연락부장을 평양에 보냈지요. 따라서 대외연락부장인 왕자루이는 양국 지도자를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지요.

두 사람의 인연은 2001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2000년 5월 이어 2001년 1월에 다시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을 왕자루이가 단둥(丹東)에서 영접하면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지요. 당시 왕자루이는 칭다오(靑島) 시장을 역임하다가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으로 옮긴 이후였지요. 그 곳에서 북한 노동당을 맡았지요. 최근 주북한 대사로 거명되고 있는 류홍차이(劉洪才) 대외연락부 부부장이 맡고 있는 자리였지요. 왕자루이는 2001년 2월, 2004년 1월, 2005년 2월, 2008년 1월, 2009년 1월, 2010년 2월 등 6차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났지요. 특히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진 직후인 2009년 1월에 평양을 방문한 것은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지요. 당시 김정일과 악수하는 사진은 그의 건강에 대한 온갖 소문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결정타였지요. 그리고 왕자루이의 존재감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지요. 이제 그의 방북은 북한의 향후 진로를 가늠하는 방향타가 됐지요.

그러면 최근에 그는 왜 김정일을 만났을까요?
중국 신화통신사는 “한반도 핵문제를 원만하게 처리하자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구두 메시지와 적절한 시기에 중국을 방문해 달라는 후 주석의 초청 의사를 전달했다”고 보도했지요. 그 보도 이후 지난 1월 이후 잠시 주춤했던 김정일의 방중설이 다시 제기되고 있지요. 과연 왕자루이는 신화통신사가 보도한 대로 중국의 원칙적인 입장만을 전달하기 위해서 북한에 갔을까요? 양국의 속사정을 살펴보면서 그 궁금증을 풀어보지요.

먼저 중국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중국은 올해 가장 큰 국가행사로 상하이 엑스포 (5월 1일~10월 31일)를 준비하고 있지요. 인천에서 상하이 까지는 900km 정도이므로 비행기로 2시간 정도 걸리지요. 북한의 서해 연해에서도 가까운 거리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북한은 올 1월 들어 해안포를 발사하거나 NLL 위협 비행을 하는 등 서해안을 긴장시켰지요. 중국은 이를 자기들에 대한 불만의 표현으로 받아들였지요. 왜냐하면 북한은 중국이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경제적 지원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중국에 여러 차례 제기했기 때문이지요. 중국으로서는 북한을 달래거나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지요. 중국의 메신저이자 해결사인 왕자루이가 나설 수 밖에 없었지요.

둘째, 중국은 6자 회담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었지요.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강대국’에 걸맞는 행동을 하고 싶은 중국은 6자 회담 의장국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었지요. 대북 강경 정책을 고수했던 부시 행정부와 달리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적인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중국은 아직 6자 회담이 열리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지요. 중국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2009년 8월)과 보스워스 북핵 특사(2009년 12월)의 방북 등으로 북미 간에 대화 기류가 조성되고 있는 이 기회에 의장국으로서의 제 역할을 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러면 북한의 입장은 어떨까요?
첫째, 북한은 현재 평양에서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지요. 설상가상 남북 관계마저 꼬여 있어 기댈 곳이라고는 중국 밖에 없지요. 북한은 남북 관계가 이대로 지속되면 2000년 이후 조성된 남북한간의 긴장 완화를 다시 원점으로 돌릴 수 있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지요. 그러면 그 대안으로 경제적 지원이 가능한 중국을 고려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왕자루이의 방북 요청을 받아들였지요.

둘째, 북미 간의 대화 기류에 따라 6자 회담에 나갈 명분을 쌓고 싶었지요. 김정일이 왕자루이와 함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베이징으로 보낸 것도 3월 중으로 6자 회담에 복귀하겠다는 의사가 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지요. 그리고 김정일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고려해 올해 내 평양-워싱턴 상주 연락사무소 설치와 함께 정전협정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싶어 하지요.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왕자루이와 김정일은 양국의 이해에 따라 만나고 헤어졌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는 잊지 않았지요. 두 사람의 이번 만남에서 공개된 특별한 결과는 없었지만,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꽃피는 3월에는 북중, 남북 관계 모두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고수석 기자는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를 거쳐 통일문화연구소에서 북한 관련 취재를 했다. 중앙일보 전략기획실 차장. 고려대에서 ‘북한· 중국 동맹의 변천과정과 위기의 동학’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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