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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스스로 낮추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과거의 악습을 과감히 고치고 새롭게 살아보겠다고 결심하는 이들 가운데 그 시작 날짜를 물으러 오는 이들이 많다.

기도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니 그 입재일을 잡아 달라는 것이다. 그 때마다 나는 조사들처럼 "무집착과 자비의 마음으로 행하면 날마다 좋은 날" 이라고 일러준다.

그러나 이 대답에 대해서 상대는 시큰둥해한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손가락 12지 표시 마디를 돌려가며 짚어보는 시늉을 하고는 날을 정해 준다.

그러면 상대는 굳은 믿음으로 기도를 시작한다. 우리 모두가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길일을 언제로 할까.

희망을 갖지 않은 이는 없으리라. 대개 희망사항은 물질적인 성취에 집중된다. 좋은 학교.직장.자리, 그리고 큰 소득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원한다고 해서 다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운이 따라줘야 한다" 는 말이 나타내듯이 시절 인연이 맞는 소수의 사람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희망에는 자기만이 아닌 바깥의 환경에 의지하는 의타성(依他性)과 잘되기를 바라는 기복성이 따른다.

왜 우리는 높이 오르고 많이 소유하려고 할까. 보다 많은 이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고' 자기에게 굽실거리며 비위를 맞추고 도움을 바라는 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뭔가를 얻기 위해서 자신 앞에 두손을 모으고 조아리는 이들이 없다면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 사투를 벌이듯이 매달리는 이는 없을 것이다.

여기 저기 얼굴을 내미는 이들의 연설문에 '국가.민족.사회.인류 등을 위해서' 라는 식의 말이 자주 나오는데 말하는 이나 듣는 이가 그 말의 의미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더라도 사람이 성공 의지를 갖게 되는 본능적 또는 무의식적 이유는 자기를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다. 남에게 주기 위해서다.

남을 의식하고 남을 위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사항이다. 높이 오르지 못하고 낮은 자리의 사람은 억지로라도 남을 떠받들어야 한다. 직장에 있든 거리에 있든 주변 사람을 위하는 모양새를 짓지 않고는 밥을 얻어먹을 수가 없다.

학창 시절에 수재 소리를 듣던 이는 사회에 나와서 별 수가 없고, 놀기 좋아하던 이가 뒷날 크게 성공하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후자가 남을 위하는 법을 더 많이 터득하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높이 오르는 이나 그렇지 못한 이가 똑같이 남을 위해야 하는 점에서는 같지만 수요.공급에서 불균형이 생긴다. 높이 올라서 군림하는 고자세로 남을 위하고 싶어하는 이는 많고, 남 밑에서 눈치를 봐가며 떠받들려고 하는 이는 적다.

더욱이 지위의 높낮이는 피라미드형으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윗자리는 적고 아랫자리는 많다. 지원성향을 보면 오히려 위쪽을 향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아래쪽을 향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이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불경에는 보살도(菩薩道)가 나온다. 수행자가 수행과정에 남을 위해야 하는데, 높은 자리가 아닌 낮은 자리를 자원하는 것이다.

한평생만이 아닌 수천 수만생을 거듭하면서 남을 받드는 일을 하겠다고 서원(誓願)을 세운다. 예를 들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수백생 동안 상대의 종으로 태어나서 상대에게 순종하고 받들겠다고 발원(發願)을 한다.

희망이 물질적.타율적.구복적(求福的)인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면, 서원은 정신적.자율적.작복적(作福的)인 측면이 강하다. 희망은 남 위에 올라타려고 하기 때문에 복을 구하려고 하고, 서원은 남 밑에서 받들려고 하기 때문에 복을 짓게 된다.

선사들은 "자기의 즐거움을 버릴 수 있고, 힘든 일을 참고 해낼 수 있다면 무엇을 이루지 못하랴" 라고 가르친다. 자기 즐거움을 버리고 남을 위하겠다는 서원으로 자기 개혁의 시작 날짜를 잡는다면, 지금이 제일 좋다. 오늘은 한살을 더 먹고, 더 철이 들고, 더 어른스럽게 되는 양력 정월 초하루이니까.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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