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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그래도 다시 파이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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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세밑 어느 중견 제조업체의 종무식. 공장장은 건배에 앞서 딱 한마디를 했다.

"새해엔 희망도 절망도 말하지 말고 발길 닿는 대로 갑시다. 그리고 다들 건강에 주의하고…. " 조금은 의외였다.

'불도저' 라는 별명을 가진 자의 발언으로는 '함량 미달' 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굳이 행간을 읽자면 '되는 대로 하자' 식의 발언에 가까웠다.

한해 성과도, 새해 전망도 괜찮은 회사가 이랬으면 다른 곳은 오죽했을까. 사실 다들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해를 넘겼다.

만 3년 전, 더 혹독한 일이 벌어졌지만 오히려 지금의 절망이 더 깊다고 얘기할 뿐이다. 사람들은 "만일 오늘, 경제 살리기 캠페인을 한다면 누가 장롱 속 금을 들고 나올지 의심스럽다" 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특히 '닷컴 잔치' 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정보기술(IT)을 근간으로 한 신(新)경제에 대한 불신도 깊었다. 하지만 굴뚝산업으로 비유되는 구(舊)경제가 새로운 활력을 제공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e비즈그룹 강태영 대표의 말대로라면 '신.구 경제의 충돌' 이다. 그는 "지난해 원유가격 폭등은 구경제의 반란이기엔 충분했지만 그리 위력적이진 못했다" 며 "닷컴 기업의 추락과 코스닥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미래는 IT에 있다" 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젊은 닷컴 기업인들이 겨울잠을 포기한 채 새 장(場)을 찾아 꼼지락거리는 것은 그 연장선 상이다. 한 인터넷 경영자는 "소용돌이 속에서 그나마 어디로 방향을 고쳐잡아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았다" 는 자위의 말을 앞세운다.

"나라 경제를 '유리 상자' 안으로 밀어 넣는데 철저해야 할 한해. " 한국증권연구원 노희진 연구위원의 말이 올해 과제를 함축하는 듯하다.

구조조정 작업은 계속될 게 뻔하고 투명성의 얘기도 반복될 것이다. 경제 주체들 모두는 안이 훤하게 들여다 보이는 곳에 자리할 각오를 해야 할 일이다.

일단 눈 앞은 철조망이다. 우회할 수도 있고 편법을 동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면돌파로 장애물을 넘어서는 한 해를 만들 순 없을까. 특히 '발길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가자' 는 발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경제는 '경제하려는 의지(the will to economize)' 에 따라 달리 움직이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허의도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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