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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바꾸는 디자인, 도시의 경제까지 바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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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호 10면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국가의 경제 위기 상황에 취임했다. 그는 디자인이 경제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책이라 판단하고 취임 초 각료회의에서 “Design or Resign(디자인하지 않으려면 그만둬라)”이라며 디자인 진흥정책을 펼쳤다. 1997년 취임한 토니 블레어 총리도 “Cool Britain(멋진 영국)”을 내세우며 대처 전 총리의 디자인 진흥정책을 계승했다. 이처럼 선진국 도시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도시 디자인을 경쟁력의 핵심으로 중시하고 있다.

23~24일 열리는 ‘서울 세계디자인도시서밋’

디자인과 경제학의 합성어인 ‘디자이노믹스(Designomics: design+economics)’는 디자인 자체가 갖는 경제적 가치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의미다. 권영걸 서울대 교수는 “디자인은 도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방식 중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말한다. 도시 경쟁력은 도시 자체의 매력과 활력뿐 아니라 경제적 잠재력까지 포함된 개념이다. 디자인으로 도시 경쟁력을 키우는 데 성공했거나 도시 업그레이드를 추진 중인 전 세계 32개 도시(18개국) 대표가 이달 말 서울에 모인다. 그들은 23~24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리는 ‘WDC 세계디자인도시서밋’에 참석한다. 방콕·에인트호번·헬싱키·마나즈루 등 10개 도시는 시장이, 리스본·이스탄불·베이징 등 7개 도시는 부시장이 참석한다. 나머지 15개 도시는 대표단을 파견했다. 서밋의 주제는 ‘도시, 디자인으로 도약하다’.

서울시는 올해(2010년) 세계디자인수도(WDC) 자격으로 서밋을 주최한다. WDC 프로젝트는 도시가 중심이 돼 디자인을 활용,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세계디자인연합(IDA) 산하 국제산업디자인단체총연합회(ICSID·50여 개국 150여 개 단체 및 15만 명의 디자이너가 회원인 민간기구)가 주관한다.나건(50·홍익대 국제디자인대학원 교수) WDC 총감독은 “산업이 아닌 도시에 디자인을 적용해 도시의 가치를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은 세계적 추세”라며 “각 도시들의 다양한 성공 및 실패 경험을 공유하고 공통분모를 찾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중앙SUNDAY는 서밋에 참가하는 도시 가운데 디자인을 통해 도시 경쟁력을 제고하고 지역 경제 회생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를 짚어봤다.

도시에 개념 도입한 로테르담-그라츠
네덜란드 남서부 자위트홀란트주에 위치한 항구도시 로테르담. 면적은 서울시의 절반(319㎢)인데 인구는 58만 명이다. 도시 설계와 대형 건축 디자인 분야에서는 세계가 인정하는 도시다. 로테르담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두 차례 큰 폭격으로 도시 중심부와 항구 지역이 파괴됐다. 시 정부는 도시를 재건하면서 기능과 디자인 두 가지 측면을 고려했다. 설계를 맡은 도시 건축가 비테베인(Witteveen)과 판 트라(Van Traa)는 ▶남북 방향 도로로 도시 중심지와 마스강 간의 연관성 강화 ▶도시 중심지 서쪽의 도시 기능 확장 ▶보행자 쇼핑 지대 고안 등을 강조했다. 이 중 보행자 쇼핑 지대 개념은 이후 전 세계에서 모방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시에 건립된 ‘쿤스트하우스’. 현대미술전시장인 쿤스트하우스가 2004년 무어강 서쪽의 빈민가에 들어선 후 문화지대로 변화했다. [중앙포토]

다음 역점을 둔 것이 도시(공공) 디자인이다. 교통운송체계를 정비하고 시민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의 디자인을 개선하는 것 등이 핵심 과제다. 현재 로테르담 상가에는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디자인과 기능을 살린 다양하고 독특한 건물들로 채워졌다. 1996년 개통한 마스 강을 가로지르는 ‘에라스뮈스 다리’는 자동차·트램·자전거·보행자가 동시에 오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로테르담은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제안한 ‘클린턴 기후 구상(Clinton Climate Initiative)’을 실현할 대표 도시로 꼽힌다. 단순한 이산화탄소의 감축 차원을 넘어 지속 가능하고 건강한 도시 건설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원동력이 세계적 수준의 도시 디자인 능력에 있다는 데 전문가들은 이견이 없다.

오스트리아 남쪽 인구 25만여 명의 그라츠 시. 문화시설을 건립, 우범지대를 사람 사는 동네로 변모시켰다. 이 도시를 관통하는 무어 강의 서쪽은 빈곤층 밀집 지역이다. 범죄율이 높아 밤이면 인적이 끊기기 일쑤였다. 시는 2004년 이곳에 500억원의 예산을 들여 현대미술 전시공간인 ‘쿤스트하우스’를 지었다. 영국의 건축가 피터 쿡과 콜린 푸르니에가 설계한 쿤스트하우스는 우주선 같은 독특한 모양이었다. 청색 아크릴 외장재 안쪽에 700여 개의 형광등을 설치했다. 이것을 시시각각 다른 패턴으로 점멸하도록 했더니 밤이면 꿈틀거리는 연체동물처럼 보였다. 이곳에 DVD 감상실, 쇼핑센터, 재즈바, 아틀리에 등 작은 공연장과 카페가 속속 들어섰고 문화 명소가 됐다. 당초 시민들의 80%가 건립을 반대했지만 지금은 이 건물을 ‘친근한 외계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도시 건축 디자인 한 개가 주변의 도시 공간을 문화지대로 바꿔놓은 도시 개조의 성공 사례다. 그라츠 시는 또 계층 간의 사회적 통합을 위해 강을 활용했다. 무어 강 서쪽 빈곤 지역과 동쪽 부유층 거주 지역의 소통을 위해 강 중앙에 인공섬을 건립했다. 보행교를 설치해 양쪽에서 걸어서 올 수 있게 했다. 인공섬 안에는 투명한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카페를 설치, 강물과 같은 눈높이에서 차를 마실 수 있게 했다. 강 양편의 이질성을 화합으로 전환하는 효과를 얻었다는 평가다.

풀뿌리 디자인의 힘- 마나즈루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에는 인구 8900명의 작은 어촌마을 공동체 마나즈루가 있다. 도쿄에서 전철을 타고 1시간30분 거리. 마나즈루는 일본 내 최고의 디자인 실험도시다. 우리나라에선 공해 수준인 모텔과 횟집 간판이 여기엔 없다. 비밀은 집집마다 전화번호부처럼 가지고 있는 ‘미의 기준(美の基準·Bi no Kijun)’이라고 불리는 디자인 코드집(리노베이션 조례)에 있다. 이는 마나즈루 마을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따라야 하는 삶의 규칙을 뜻한다.

마나즈루는 1980년대만 해도 무분별한 리조트·펜션 개발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그러자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 91년 법률·디자인·건축 전문가 3명과 마나즈루 지자체의 프로젝트팀, 주민 10명으로 구성된 특별 전담반이 ‘마을 리노베이션 조례’를 만들기 시작해 만 2년 만인 93년 공포됐다. 주민들은 마당을 꾸미거나 돌담·대문을 교체할 때도 이 코드집에 따라 한다. 코드집은 여덟 가지 테마로 분류됐다. ▶장소 ▶품격 ▶척도 ▶조화 ▶재료 ▶장식과 예술 ▶커뮤니티 ▶전망이다. 이를 다시 지역의 특징과 역사, 자연을 표현하는 69가지 키워드로 풀었다.

‘벽의 감촉’ ‘경사면의 형태’ ‘풍부한 식생’ 등이 그것이다. 키워드마다 ‘전제 조건’ ‘해결법’ ‘과제’의 항목으로 나뉘어 설명돼 있다. 이 여덟 가지 테마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저술한 '영국의 비전:건축에 대한 개인적 견해'라는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찰스 왕세자는 한때 아름답게 서 있던 역사적 건물들이 하나씩 파괴될 것을 우려하면서 책을 썼다. 미의 기준은 강제적이지 않다. 참여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창조가 가능한 과정이다. 그런 참여 속에서 개정되고 성장해 나간다. 끝이 없는 디자인 실험인 셈이다. 마나즈루는 코드집 하나로 상점마다 가지고 있는 복잡한 간판을 없애고 깔끔한 마을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 인한 부가가치는 ‘주민이 스스로 디자인해 가는 마을 마나즈루의 탄생’이다.
이번 세계디자인도시 서밋에 참가하는 32개 도시의 디자인 경험은 각기 다르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모든 유형이 포함되겠지만 도시별로 들어가면 디자인 정책의 주안점이 세분화되는 특성이 보인다. 시민들이 사용하는 도시 디자인 중심형(로테르담)이 있고 새로 짓기보다는 재건축에 주안점을 두는 도시재개발형(함부르크)이 있다. 디자인산업 도시형(몬트리올·헬싱키)이 있는가 하면, 낙후지역을 디자인을 통해 탈바꿈시킨 도시(부에노스아이레스)도 있었다.

케이프타운처럼 자연친화형도 있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의 2005년 보고서에 따르면 디자인에 투자할 경우 신상품은 매출이 84배 증가하고 디자인 개선 상품은 매출이 두 배 증가한단다. 전문가들은 경제나 산업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도시 경쟁력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권영걸 서울대 교수는 “디자인을 통한 도시 이미지 강화, 도시마다 독특한 문화정체성과 매력적인 도시 공간 창출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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