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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공신들 손에 … 열두 살 임금은 때를 기다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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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호 32면

◀압구정 한명회는 속세에 뜻이 없음을 표하기 위해 한강변에 압구정을 지었으나 훗날 많은 문인들의 조롱을 받았다. 사진가 권태균

예종의 급서에 의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성종 즉위년(1469) 12월 1일 신숙주·한명회·홍윤성 등의 원상(院相)들과 승지 등이 대왕대비에게 예종의 시신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했다. “어제 염습할 때 대행왕(大行王:예종)의 옥체가 이미 변색된 것을 보았습니다. 훙서(薨逝)한 지 겨우 이틀인데도 이와 같았습니다”라는 보고였다. 시신 변색은 약물에 중독사했을 때 생기는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음력 11월 말은 가장 시신이 변색될 때가 아니었다. 국왕의 염습 때 원상들뿐만 아니라 왕실의 내외척들도 다수 참석해 보았기 때문에 옥체의 변색을 무작정 무시한 채 넘길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절반의 성공: 성종② 귀성군 제거 사건

예종의 병은 족질(足疾)이었다. 그런데 ‘내의(內醫)와 내시(內侍)를 국문해 처벌하라’는 주청에 정희왕후는 “대행왕은 술만 들고 음식을 들지 않았다”며 책임을 죽은 예종에게 돌렸다. 그러면서 “내의 등은 일찍이 내게 병세를 아뢰었으니 어찌 처벌할 수 있겠는가?”라고 어의를 옹호했다.

신숙주 시고 신숙주는 한명회·정인지와 함께 공신집단의 리더가 돼 국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의혹의 초점은 어의 권찬이었다. 세조가 총애하던 후궁 윤소훈(尹昭訓)의 오촌숙(五寸叔)인데 '예종실록'은 ‘권찬은 의술로써 세조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은혜와 사랑이 보통과 달랐다’고 전할 정도로 세조는 물론 예종도 총애하던 어의였다. 그렇기에 더욱 의혹이 일었으나 권찬 처벌 주장에 대해 정희왕후는 “대행왕의 발병은 뜸으로써 치료해야 하는데도 이를 꺼려했으니 권찬이 비록 시좌(侍坐)했더라도 진맥을 할 수 없었는데 어찌 병의 증상을 알았겠는가?”라면서 거듭 예종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정희왕후는 나아가 “내가 이미 상심하고 있는데 또 허물이 없는 사람에게 죄를 받게 한다면 하늘이 나를 어떻게 여기겠는가?”라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권찬을 옹호했다.

사헌부의 수사 주장에 대해서도 “의원이 또 약을 드시라고 청했으나 대행왕이 굳이 거절한 것이니, 권찬 등은 실상 죄가 없다('성종실록'즉위년 12월 3일)”라고 옹호했다. 정희왕후는 성종 1년(1470) 2월 7일에는 권찬을 종2품 가선대부 현복군(玄福君)으로 승진시켰다. 이때는 성종이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정희왕후가 섭정하면서 한명회 등 원상들과 정사를 처리하던 때로서 권찬의 승진은 정희왕후와 원상들의 합의의 결과였다. 시신이 변색돼 죽은 예종이 땅에 묻히기도 전에 의혹의 당사자를 승진시킨 것이다. 당연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순릉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에 있는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 한명회의 딸로서 남편을 국왕으로 만드는 괴력을 발휘했으나 성종 5년 후사 없이 죽는 바람에 아들을 즉위시키지는 못했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것이 귀성군(龜城君) 사건이었다. 예종 사인과 성종 즉위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던 성종 1년(1470) 1월 2일 초저녁. 생원 김윤생(金允生)과 별시위(別侍衛) 윤경의(尹敬義)가 승정원에 나타나 전 직장(直長) 최세호(崔世豪)를 역모로 고변했다. 최세호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가문을 멸시할 수 없다. 우리 귀성군은 왕손이 아닌가? 숙부 길창군(吉昌君:권람)은 나에게 ‘귀성군은 건장하고 또 지혜가 있으니 신기(神器:왕위)를 주관할 만한 사람이다’고 말했다. 지금 어린 임금을 세웠으니 나라의 복은 아니다. 어째서 왕위를 잘못 결정했을까? 내가 했다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성종실록' 1년 1월 2일)”

최세호는 귀성군의 부친인 임영대군(臨瀛大君:세종의 4남) 부인의 친족이었다. 세조 12년(1466)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귀성군은 이듬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발생하자 세조에 의해 만 17세의 나이로 진압 총사령관인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에 임명됐다. 종친들을 키워 공신들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귀성군과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적개공신 1등에 책봉돼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의 구공신에 맞서는 신공신을 형성했다. 세조는 14년(1468) 귀성군을 영의정, 남이를 병조판서로 임명해 구공신을 견제시켰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고위직에 오른 귀성군과 남이는 구공신에 맞서는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대신 분열했다. 남이는 세조 14년(1468) 5월 귀성군의 중용을 비판하다 하옥됐다. 귀성군은 5개월 후인 예종 즉위년(1468) 10월 발생한 남이의 옥사 때 한명회 편에 서서 남이를 제거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올랐다. 남이는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한 권람의 사위였으므로 결국 권람은 사위를 죽일 인물을 키운 셈이 되었다.

생원 김윤생 등이 귀성군을 겨냥해 고변한 최세호는 심한 고문을 참으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자 1월 13일에는 한명회의 조카들인 한계미·한계희·한계순이 일제히 전 감사 권맹희(權孟禧)를 공격하고 나섰다. 이 역시 목표는 귀성군이었다. 권맹희가 한계희 등에게 “무엇 때문에 형을 버리고 아우를 세우는가” “귀성군도 물망(物望)이 있는 사람이다” “최세호를 힘써 도모해주기 바란다”는 등의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귀성군과 최세호를 한번에 엮어 재차 공세를 취한 것인데, 한명회를 비롯한 구공신들의 계획된 정치공작이었다.

바로 그날 신숙주는 정희왕후 윤씨에게 면담을 요청해 한명회·구치관·홍윤성 등 원상들과 고변 당사자인 한계미·계희 등을 대동하고 대비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신숙주는 “이준(李浚:귀성군)이 세조 때도 나인(內人)과 통정했으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고 느닷없이 세조 때의 일을 폭로하면서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이준이 비록 작은 공이 있지만 돌볼 것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선왕(先王) 때의 죄를 다스려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외방(外方)에 유배(流配)시키소서. 이것은 사실 그를 보전하려는 것입니다.('성종실록'1년 1월 13일)”

귀성군은 아무 죄도 없지만 이제 사라져줘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정희왕후가 난색을 표명하자 같은 날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 등 공신(功臣)들이 합동으로 상소를 올려 귀성군 공격에 가세했다. 공신들에 맞서던 예종이 사라진 지금 권력은 이미 정희왕후가 아니라 공신들이 갖고 있었다. 다음날 문무(文武) 2품 이상의 관원이 대궐 뜰에 모인 가운데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가 “귀성군이 선왕 때에 득죄했으며 지금 또 군소배들이 지적해서 말하는 바가 되었으니 마땅히 서울에 있을 수 없습니다”고 다시 공격했다.

정희왕후는 “귀성(龜城)은 세조께서 돌보아 사랑했는데 지금 지방으로 내쫓는다면 세조의 뜻에 어긋날까 두렵다”고 반대했으나 신숙주가 “세조께서 만약 오늘 계신다면 역시 용서하지 않으셨을 것이니 빨리 법으로 속단하소서”라고 일축했다. 정희왕후는 공신들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공신들은 귀성군의 처리 방침을 문서로 작성했다.

“이준은 공신 명부에서 삭제하고 직첩(職牒)을 회수하며 경상도 영해(寧海)에 안치(安置)하고 가산을 적몰한다.”
정희왕후는 ‘적몰가산(籍沒家産)’이란 넉자를 지워버려 재산은 빼앗지 않는 것으로 타협했다. 아무 죄도 없이 서인으로 강등된 귀성군은 성종 10년(1479) 1월 죽을 때까지 영해에서 울분에 찬 채 지내야 했다. 권맹희와 최세호는 능지처사되고 집안이 멸족된 지 오래였다. 귀성군 제거 사건은 공신들의 권력이 왕실 위에 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었다.

세조가 말년에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종친세력은 성종 즉위와 동시에 쑥대밭이 됐다. 성종 5년(1474)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종친사환금지(宗親仕宦禁止)를 규정해 종친은 법적으로 정치에서 배제시켰다. 그러자 종친의 지위는 크게 낮아져 성종 8년(1477) 6월 “종친과 혼인하지 않기 위해 그 자녀의 나이를 숨기는 자를 논죄(論罪)하는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아뢰라”는 명을 내려야 할 정도가 됐다.

열두 살에 임금이 된 성종은 즉위 초 공신집단에 맞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왕권 행사가 아니라 국왕 수업을 받는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권력은 공신들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즉위한 국왕을 수업시키는 경연(經筵)의 주체 역시 원상(院相)들이었다. 정희왕후는 성종 즉위년 12월 8일 원상들을 영경연(領經筵)으로 겸임시켜 성종의 교육을 맡겼다. 다음날 신숙주는 '논어(論語)'부터 진강하고, 하루에 두 번 조강(朝講)과 주강(晝講)을 실시한다는 국왕의 경연 사목(事目)을 만들었다. 정희왕후가 성종 1년(1470) 1월 “주상(主上)께서 처음 학습하면서 문리(文理)에 통하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로 성종은 학문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종은 이후 하루 두 번의 경연에 성실히 임하면서 학문이 일취월장했다. 성종은 학문에 전념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현실은 공신들의 것이지만 미래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