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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좋은 정부 나쁜 정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좋은 녀석, 나쁜 녀석, 추한 녀석' 이란 왕년의 할리우드 서부영화가 생각난다. 은행금고를 턴 한 강도가 거액을 어딘가에 묻어놓고 죽어버린다.

세 사나이가 이 돈을 찾아 나서며 선(善)과 악(惡)과 추잡함이 대결을 펼친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비정한 '사이버 황야' 다.

눈앞의 이익을 찾아 우르르 몰려왔다가 조그만 악재나 낌새에도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금융의 빗장은 이미 망가졌고, 끌어다 쓴 빚으로 국제금융자본에 덜미가 잡혀 있는 한 위기는 어느 때고 찾아온다.

국제금융자본의 '투기적 공격' 은 곳곳에서 회오리를 몰아오고, 급기야 국제석유 선물 및 현물시장까지 넘보며 유가마저 춤추게 만든다.

부실을 털어내고 시장원리에 따라 새로운 룰과 제도를 정착시켜 안정장치를 갖추는 일이 다름 아닌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이다.

동남아 외환위기를 겪은 지 벌써 3년이 흘렀지만 각국의 구조조정은 좀처럼 진전을 모른다. 개혁을 이끌어야 할 그들 정부부터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구조개혁이 서류로만 맴돌 뿐 문제를 장기화시키며 경제를 침체 속에 빠뜨리고 있는 일본 정부는 '나쁜 정부' 로 분류된다.

탄핵재판과 정치적 부패로 개혁이 뒷걸음질치는 필리핀.인도네시아.태국은 '추한 정부' 트리오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의 김대중 정부는 한동안 'IMF 극복 우등생' 으로 싱가포르와 함께 '좋은 정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구조개혁이 예상외로 부진하고 연이은 부패스캔들, 그리고 의약분업과 노사대립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정부의 관리능력이 의문시되면서 '나쁜' 내지 '추한' 정부로 그 평가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개혁부진의 탓은 물론 정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닷컴경기와 주가폭등에 업힌 금융장세, 일부 소비과열과 수십조 공적자금의 흥청거림 속에 너나할 것 없이 개혁열의와 모멘텀이 무뎌진 탓도 무시하지 못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밀어붙이기식 구조조정은 안된다며 재계는 물론이고 언론까지 덩달아 뒷다리를 잡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근본원인은 역시 정부의 일관된 개혁 리더십 부재에 있다. DJ정부는 아직도 '아마추어 정부' 티를 못벗고 있다.

신선미와 개혁의욕은 돋보였지만 이를 국정운영에 투영시키고 제도화할 수 있는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변에 드물다.

집권 초기 IMF적 위기상황과 금모으기 등 국민적 호응 속에서 이같은 약점은 묻혀 지나가지만 집권 후반에 접어든 지금은 다르다.

정실인사나 측근 봐주기를 넘어 프로페셔널 정부로 효율적 관리능력을 보여야 한다. 노조의 지지에 힘입어 집권한 이상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노조가 지금까지도 DJ정부의 아킬레스근이 돼서는 곤란하다. 대의를 위해 지지세력을 '배반' 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민주화와 함께 모두가 다투어 제 소리를 내는 다원주의는 당연하다. 그러나 좋은 정부-사회적 절제-페어 플레이가 선순환을 이룰 때 다원주의는 성숙해진다.

지금 한국은 거꾸로 나쁜 정부 - 더러운 정치 - 집단 이기의 악순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다.

정부와 정책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대통령부터 마음을 비우고 국민 앞에 정직하고 진솔하게 나서야 한다.

정전도 불사하며 전력노조가 파업을 위협해왔을 때 영국의 대처 총리 같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전력산업 구조개편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며 "국민 여러분 저와 함께 촛불로 며칠 견딜 각오을 하십시다" 고 호소하지 않았을까.

대중은 정치나 경제분야의 복잡하고 전문적인 사항은 사실 잘 모른다. 번드르르한 발표문보다 지도자가 정직하고 국가문제해결에 진지한 모습으로 다가갈 때 그를 신뢰하고 따른다.

레이건 대통령은 비서관들이 써주는 연설문 속에 항상 자기 자신의 말 몇마디를 끼워넣어 국민 앞에 직접화법 형식으로 진솔하고 신념에 찬 대통령의 이미지를 심었다.

임기 이후나 차기정권 창출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 앞에 못할 일은 없다. 시장의 실패보다 정부의 실패가 더 무섭다. 그의 노벨상 수상이 좋은 정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변상근 <중앙영자신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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