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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일왕을 말하다 … 70년 죽마고우 하시모토 아키라 특별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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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늘 ‘시기상조’란 이유로 미뤄져 왔던 일왕(일본에선 천황)의 방한 문제가 빈번하게 거론되고 있다. 과거사의 앙금을 털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나아가는 이정표를 세우는 데 일왕의 방한이 갖는 상징성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고 70년간 친구로 지내온 일왕의 죽마고우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77·왼쪽 사진)를 만나 일왕의 마음속에 깃든 한국에 대한 인식과 인간 아키히토의 면모에 대해 들어봤다.

-일왕 본인은 방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직전 천황을 만났을 때 내게 한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천황은 ‘대통령을 일본에서 맞아 나의 진심을 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가 한국에 가서 얘기하면 훨씬 쉽게 진심이 통할 것’이라고 했다. 그 뒤 노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은 불행한 시기에 귀국 여러분이 고통을 맛본 걸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통석의 염) 금할 길이 없다’고 발언했다. 천황은 그런 얘기를 한국에 가서 보다 더 진솔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라 본다. 내가 알기에 천황의 그런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실은 황태자 시절인 80년대 나카소네 정부, 한국의 전두환 정권 때 방한 준비를 끝내고 있었는데 돌연 중단된 일이 있다. ‘독재 정권인 한국에 왜 가느냐’며 주위에서 말렸다는 등 소문이 구구했다. 내가 나중에 직접 물어보니 ‘황태자비가 병에 걸려 일본을 뜰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일이다.”

-본인의 의사가 그렇다면 방한은 쉽게 성사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천황의 해외 방문은 ‘국사행위’라 하여 정부가 최종 결정하는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취임 직후 일본 방문 때 천황을 만나 초청 의사를 밝혔다. 이때 천황은 ‘마음은 감사히 받겠으나 결국엔 정부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정부 간 협의만 남은 셈인데, 아직 양국 정부가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 일왕의 역사 인식은 어떤가.

“천황은 올바른 역사 인식의 중요성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 황태자시절엔 내가 놀랄 정도로 방대한 사료를 꼼꼼히 읽고 과거 일본이 전쟁을 선택하게 된 과정을 연구했다. 이를 통해 과거 일본 군부가 어떤 잘못된 판단을 했는지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됐다고 본다. 오키나와 등 제2차 세계대전 격전지를 찾아 희생자의 영령에 참배하는 ‘위령 방문’을 계속해 온 것도 전쟁이 두 번 다시 있어선 안되겠다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아버지 히로히토 천황 때는 하지 못했던 유업(遺業)이다. 일본에 피해를 본 동남아시아나 중국도 방문했으니 한국만 남았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때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을 찾아 묵념한 것도 그 일환인가.

“일본인이 투신 자살했던 현장인 ‘만세의 절벽’을 방문하고 오던 길에 갑자기 차를 세우게 한 뒤 천황·황후 두 분만 다녀왔다. 나중에 궁내청에 당시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이뤄진 일이라 아무도 촬영을 못 했다고 한다. 본인은 어떻게든 위령 방문을 실현시키겠다는 의지로 전격 방문을 택했다고 본다. 정부와 사전 협의를 했으면 이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본지 여론 조사에서는 한국 독자의 78%가 방한을 환영한다고 밝혔는데 일본에선 어떤가.

“국민의 과반수는 찬성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익 세력이 반대하겠지만 옛날만큼 목소리가 크지 않다. 하지만 정부는 최대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할 것이다. 방한 도중 천황에게 달걀 하나가 날아와도 정부로선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

-일왕의 건강은 어떤가.

“지난해 캐나다와 하와이를 2주간 방문하긴 했지만, 고령에다 전립선암도 완치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계속 약을 복용해 결코 건강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다. 방한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 아키히토는 어떤 사람인가.

소년 시절의 아키히토 일왕. 교복·교모를 착용하고 교정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왕세자 아키히토의 모습을 급우였던하시모토가 직접 촬영했다. 현상한 사진을 보여 줬더니 아키히토는 자신의 영문 사인을 해 줬다. [하시모토 제공]

“나는 늘 다른 별에서 온 사람(異星人)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황족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범상치 않아서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성격도 있다. 고3 때 하루는 황실 직원과 경호원 을 따돌리고 나와 함께 전철을 타고 긴자 번화가에 나가 찻집을 돌아다니다 오후 11시 넘어 숙소로 돌아갔다. 궁내청은 ‘황태자가 사라졌다’며 발칵 뒤집혀 있었다. ”

-왕세자 시절 파격적으로 평민 여성과 연애결혼해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59년 혼례 이틀 전 동급생 축하 모임에서 황태자는 ‘나의 결혼은 일본의 신헌법(46년 제정)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황실에서 맺어준 사람과의 결혼이 아니라 보통의 청춘 남녀와 똑같이 자유의지로 서로 사랑해 결혼한다는 표현이었다.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나는 결혼에 대해선 알아도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두 사람 간의 신사협정을 깨고 황태자의 발언을 보도했다. 나는 대특종을 했지만 황태자의 진노가 대단했다. 나중에 사과하고 화해하느라 애를 먹었다.”

-일왕과의 추억 중 기억나는 일은.

“전쟁을 피해 도치기현 닛코(日光)의 산간지방에서 여러 달 동안 천황과 함께 지낸 적이 있다. 먹을 것이 부족해 늘 배가 고팠고 옥수수나 감자 등으로 때우는 일도 많았는데 현 지사가 달걀 두 개를 왕세자에게 바친 기억이 난다.”

도쿄=예영준 기자

◆하시모토 아키라=아키히토 일왕과 같은 1933년생. 황족의 교육기관인 가쿠슈인(學習院)에 들어가 초등과에서 대학 과정까지 함께 다녔다. 졸업 후 교도(共同)통신에 입사, 제네바·로스앤젤레스 지국장과 국제국 부국장을 지냈다. 지금까지도 일왕 부처와 교류를 계속하며 『헤이세이 황실론』을 출판하는 등 왕실에 정통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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