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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문의 새 길] 14. 대중영화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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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대중영화론은 영화의 중심을 대중에게서 찾으며 그들의 눈높이로 영화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영화를 이끄는 주체는 '관객' 으로 불리는 대중이다.

제작자나 감독, 배우들은 영화를 만들지만 그렇게 만든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받아들일까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말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특정 영화의 선택이라는 행동으로 표현한다.

흥행의 결과는 대중의 선택이며 동시대의 발언이기도 하다. 그 선택은 다시 영화제작으로 환원됨으로써 관객과 영화인은 끝없이 교감한다.

그러나 우리 영화문화에서 관객인 대중은 쉽게 무시당하고 매도당한다. 그들의 선택은 저급한 휩쓸림으로 몰리기 예사고, 때로는 올바른 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관객은 영화의 흐름을 좌우하는 중심적 주체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교도(敎導)하고 정형화해야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현학적 자기과시로 포장한 마니아 비평이거나, 교조적 훈계로 가득찬 엘리트 영화 담론들이다.

영화에 관한 글들은 전문가들끼리만 주고받는 암호문처럼 어려워지면서 관객과 영화를 격리시키는 현상까지 생기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선뜻 헤아리기 힘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를 인류 구원의 등불처럼 찬양하고,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이란의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현대판 '페르시아의 현자(賢者)' 로 떠오르게 했던 것은 비평이라는 명분으로 유통되는 엘리트 담론들이 대중적 영화보기를 얼마나 왜곡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 현상이다.

나름대로의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는 특정한 영화제 중의 하나인 칸 영화제를 모든 영화 예술가들의 영혼을 세례하는 성스러운 의식처럼 과장하는 것이나, 한 두 편의 영화를 감독한 신인 감독들을 한국영화의 미래를 보장하는 '대가' 처럼 분장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수많은 관객들은 자신이 본 영화와 우박처럼 쏟아지는 '전문가들의 말잔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때로는 주눅들기까지 한다.

평론가들이 별표를 다섯개씩 주며 최고라고 추천하는 영화는 왜 그다지도 어렵고 지루하고 혼란스러운지,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본 영화는 왜 형편없는 취급을 당하는지를 납득하기 어렵다.

그 앞에서 자신의 영화취향이 잘못된 것이거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스러워 하기도 한다.

자신의 눈높이로 영화를 즐기고 받아들이기보다는 평론가들이 꼽는 이런저런 요소들을 찾아내고 이해하느라 머리를 싸매는 경우도 흔하다.

영화보기가 편안한 자세와 마음으로 즐기는 문화적 참여가 아니라 눈을 부릅뜬 채 치열하게 의미를 찾아 나서야하는 노동으로 바뀌는 대목이기도 하다.

되돌아보면 이같은 왜곡과 편견의 역사는 길다. 영화가 처음 우리에게 소개되던 당시, 근대화된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던 개화파 지식인이나 관료들은 영화를 계몽의 수단으로 인식했고, 식민지 지배를 고착시키려는 일제는 대중선동을 위한 선전매체로 장악하고자 했다.

해방은 일제의 통제로부터는 벗어나게 했지만 남북 분단으로 인한 이념과 체제의 대립을 불러왔고, 그로인한 갖가지 통제와 왜곡은 넘기 힘든 또 다른 장애였다.

영화제작에 필요한 물리적 환경이 극도로 빈약한 가운데 정치권력의 왜곡, 엘리트 문화에 대한 과신, 극단적인 이념의 대치같은 현상들이 겹치면서 한국영화는 뒤틀리고 꼬인 채 고난의 시간을 견뎌야 했고 관객은 그들의 자리와 역할에서 끝없이 희롱당해야 했다.

하지만 고난의 역사는 그 자체로 당당하고 굳센 생존의 역사이기도 하다. 영화인들의 강인한 생명력, 엘리트주의 문화에 매몰되지 않은 다수의 관객이 만든 영화들은 한국영화의 흐름을 지키고 이어왔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작가.배우.감독의 역할을 혼자서 감당하며 한국영화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나운규, 흥행자본을 제작자본으로 연결시킨 흥행사 겸 제작자 박승필, 일제의 억압에도 지조를 지키며 해방된 영화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배우이자 감독인 윤봉춘, 전쟁의 폐허 위에서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끌어 낸 이규환과 신상옥.최은희.김승호.김지미.엄앵란.신성일, 오늘날의 한국영화를 이끌고 있는 임권택.이명세.강우석.강제규.한석규같은 수많은 제작자.감독.배우.시나리오작가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던 그보다 더 많은 영화인들의 열정과 집념은 생존의 에너지였다.

'아리랑' 에 감격하고 '맨발의 청춘' 에 열광하며 '미워도 다시한번' 에 눈물찍던 관객들이나 '서편제' 나 '쉬리' 에 반응했던 관객들은 모두 한국영화의 보호자이자 후원자들이다.

'쉬리' 나 '반칙왕' '주유소습격사건' '공동경비구역JSA' 같은 영화들의 성공은, 관객들은 당당하게 자신들의 영화를 산택하고 있으며 영화인들은 대중의 눈높이가 어디이며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를 정밀하게 헤아리고 있다는 것을 실증한 경우들이다.

한국영화의 역사는 그런 영화인과 관객들의 당당한 궤적이며 패배와 좌절의 기록이 아니라 치열한 투쟁과 극복의 과정인 셈이이다.

대중영화론은 관객과 격리된 채 현학적 왜곡으로 흐르고 있는 마니아적 엘리트 담론을 경계하는 것은 물론 오랫동안 한국영화계를 누르고 있는 비하적인 패배의식, 신화적 영웅주의도 똑같이 경계하면서 한국영화의 역사적 흐름과 정체성까지도 대중영화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조희문 <상명대 영화과 교수>

◇ 다음은 서울대 황상익 교수의 '생명윤리론' 입니다.

[대중영화론은…]

'대중영화론' 은 영화의 비평이나 연구에서 중심적 주체를 '일반대중' 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화비평이나 담론은 대중들의 선택과 반응을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논리를 만들고 주장하는 쪽의 시선으로 재단하고 주도하는 경향이 강하다.

관객이 선호하는 영화와 평론가들이 극찬하는 영화는 완전히 다르고,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정작 대상이 되는 영화와는 멀어진 채 전문가들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암호처럼 변하고 있다.

영화는 대중성을 바탕으로 발전했는 데 영화평론은 오히려 대중을 외면하고 있다.

대중영화론은 이를 서양적인 시각과 이론을 여과없이 인용.적용하고 있는데서 나타나는 왜곡현상으로 보고, 한국영화의 역사와 정체성까지도 대중과 그들의 영화에서 찾아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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