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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과정을 생략할 순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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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불안하다. 현대건설.대우.주가.환율.불법대출과 로비 소문, 정치인들의 싸움, 검찰 권위에의 타격, 정권 지도력의 흔들림, 장래의 대량 실업사태 등이 우리를 불안케 한다.

내적 통찰력으로 저 불안을 이기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행.불행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한꺼번에 보는 것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는 좋았던 것이 다른 시점에는 나쁠 수 있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의사들이 파업을 할 때 우리는 불안했다. 그러나 의약정은 약사법을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의사협회의 투표에서도 합의안을 밀어주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는지 모른다. 합의할 것이라면 진작 대화로 타협을 볼 일이지 왜 그토록 난리법석을 떨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콩에서 돌을 골라 낼 때 채에 담고 마구 흔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저간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고1 말까지 상위권에만 들던 한 학생이 고2부터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자업자득으로 지난해 수능시험은 엉망이었고, 올해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고2.고3의 2년이 친구들과 자기의 위치를 하늘과 땅 차이처럼 갈라놓았다는 것을 이제야 절감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 경험담을 들은 후배 학생들은 제때에 열심히 공부할까. 아니다. 후회하는 학생들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설사 앞에서 후회한 본인에게 고2의 똑 같은 상황을 준다고 할지라도 그는 또 다시 친구들과 어울리기만 할는지도 모른다. 인연의 과정은 생략할 수가 없다.

요즘 한 연예인겸 사업가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성폭행 혐의로 망신을 당하고 있다. 구속이 되는가 하면, 방송 출연도 못하게 됐다.

그는 미남에다 사업에 성공해 돈도 많다. 말 잘하고 유머감각이 넘치는 인기 연예인이다. 방송사마다 사회자로 모시고 싶어하는 인재다.

그가 눈길만 준다면 많은 이들이 그의 손을 잡아 보기 위해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 것이다. 그가 시간과 흥미가 없어 색을 멀리한다는 것은 몰라도 여자가 도망쳐서 문제가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인물이 저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억울해 하거나 비참해 할 것 없다. 억울하다면 과거만 생각하는 것이고 비참하다면 현재만 보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이어진 한 줄기의 과정이다.

인간은 폭탄이다. 언제 어떤 일을 저지를 지 모른다. 저 연예인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다른 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도 위험물이기 때문에 너나없이 폭발할 가능성이 항상 있다.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만 자기가 아닌 것처럼 분리할 수는 없다.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결론이 아니다. 이 충동, 저 변덕의 행동들이 합해진 과정 그 자체다.

누구나 빈손으로 오가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고 해서 신생아에게 바로 죽는 게 어떠냐고 제의한다거나, 죽어 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죽을 것을 왜 그리 잘 살아 보겠다고 바둥거렸느냐고 물을 수는 없다.

우리는 과정에 있다. 결론이 뻔한데도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주장을 펴는 이들이 많지만, 인내하면서 그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오늘의 결론도 내일에 보면 또 다른 과정의 일부다.

위와 같이 관(觀)한다면, 지금 이 정도의 국난이나 불안은 별 것 아니다. 겪을 만한 것이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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