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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의 씨앗 뿌린 얄타회담 열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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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얄타회담에서 한자리에 모인 세 거두. 앉은 사람 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그리고 스탈린.

1945년 2월 4일 우크라이나의 소도시 얄타의 리바디아 궁에서 세 거두(巨頭), 즉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만났다. 루스벨트는 원래 지중해 인근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지만, 스탈린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며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흑해 부근의 휴양지인 얄타에서 만나자고 수정 제안했다. 당시 거두들은 모두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이로 인해 후에 한 정신과 전문의는 당시 정상회담에 참여했던 세 노인이 모두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다발성 경색 치매’를 심하게 앓고 있었던 상태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얄타 회담은 이탈리아가 이미 항복하고 독일의 항복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1943년 처칠은 ‘욕심쟁이’ 스탈린의 야욕에 대해 걱정했지만, 루스벨트는 말썽쟁이 일본과 독일을 고립시키기 위해 스탈린과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에 루스벨트의 생각은 너무 안이한 것이었음이 드러났지만, 세 정상은 회담을 통해 전후 전범(戰犯) 국가와 그 점령 지역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한 일정한 합의에 도달했다.

그런데 가장 주목할 점은 이 회담이 세계적 차원에서의 냉전,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분단과 일본에 대한 원자탄 투하의 기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루스벨트는 이 회담에서 독일 항복 이후 90일 이내에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중국의 동의 없이 몽골의 독립, 뤼순(旅順)항과 만주철도에 대한 소련의 이권을 승인해 줄 수 있음을 피력하였다. 이는 일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과정에서 당시 강력했던 일본 관동군의 해체를 소련군에게 떠넘김으로써 미군의 피해를 줄이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이러한 ‘꼼수’는 그의 사후 소련의 참전을 막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의 원자폭탄 사용 결정으로 이어졌다. 두 차례에 걸친 원자탄의 사용은 원자탄 사용 직후 시작된 소련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일본이 빨리 항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용해서는 안 될 무기를 최초이자 최후로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진군한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아시아에서는 전범 국가도 아니었던 한국이 분단되었다. 아울러 원자탄의 사용은 결과적으로 일본이 전범 국가에서 ‘핵 피해 국가’라고 주장하게끔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보면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은 스탈린의 야욕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미국에도 그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꼼수’는 태평양 전쟁 내내 엄청난 피해를 본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에도 또 다른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역시 대도무문(大道無門)이요,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