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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졸자 임금 격차 대해부 <중> 신분이동 동력 잃은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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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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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기술용역 회사에서 자동차 신차 개발 일을 하는 박모(53) 부장, 통신업체인 S사 정모(45) 팀장, 자동차 업계 H기업 이모(31·여) 과장은 각각 1982년 서울대, 92년 연세대, 2002년 고려대를 졸업했다. 현재 연봉은 박 부장과 정 팀장이 1억여원이다. 이 과장은 4000만원을 받는다. 박 부장은 경기도 군포의 주상복합아파트, 정 팀장은 경기도 고양시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미혼인 이 과장은 서울 강남에서 전세를 산다. 자산 규모 기준으로 박 부장은 고소득층(상위 10% 이내), 정 팀장과 이 과장은 상위 11~30%에 속한다.

하지만 이들이 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현재와는 상황이 달랐다. 박 부장은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가 실직해 벌이가 없었고 전세살이를 했다”며 “당시 기준으론 저소득층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르바이트 등으로 학자금을 마련해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정 팀장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고교와 대학 땐 등록금을 걱정하고 다녔으나 졸업 후 전망이 있는 회사에 취직해 지금은 경제적 지위가 나아졌다”고 말했다. 박 부장과 정 팀장은 “대학 학벌이 현재의 경제 수준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과 함께 82년(75~78학번), 92년(85~88학번), 2002년(95~98학번) 졸업자 8091명을 대상으로 대학 입학 당시의 가정 상황과 현재의 연봉, 경제적 지위를 비교·분석했다.

대학에 입학할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82, 92년 대졸자는 입학 당시 잘 살았던 사람들에 비해 현재 받는 연봉이 많았다. 82년 대졸자로서 입학 당시 저소득층의 현재 연봉은 평균 6942만원으로 분석됐다. 입학 당시 고소득층이었던 82년 대졸자의 현재 연봉(6441만원)보다 501만원(7.8%)이 많은 것이다.

92년 대졸자에서도 입학 당시 저소득층의 현재 연봉(5393만원)은 입학 당시 고소득층 연봉(4846만원)보다 547만원(11.3%) 많았다.

이에 비해 2002년 졸업자는 입학 당시 고소득층이 중소득층 이하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김안국 박사는 “82년 졸업자와 92년 졸업자는 경제적 지위 상승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반면 90년대 중반 학번인 2002년 졸업자는 ‘개천에서 용 나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대입 단계에서 부모의 경제력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대학 입학 당시 집안이 저소득층이었던 졸업생 비율은 20년 사이 13.4%(82년 졸업자)에서 5.8%(2002년 졸업자)로 뚝 떨어졌다.

김안국 박사는 “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더라도 머리만 좋으면 대학 교육 기회가 열리고 이를 통해 경제적 지위 상승이 가능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교육 기회가 달라지고, 소득 격차에도 영향을 주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분 고정 사회 깨려면

잘사는 집이 자녀 교육에 돈을 더 쓰고 그 결과, 좋은 대학을 나온 자녀가 좋은 직장을 잡는 것은 한국이나 선진국이나 마찬가지다. 경제 능력이 교육 투자 차이를 불러오고, 소득 격차로 이어지는 교육에 의한 ‘부의 대물림’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전재식 박사는 “대졸자 8091명을 분석한 결과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교육이 과거처럼 신분 상승의 동력이 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전문가들은 ▶저소득층 기회 확대 ▶대입제도 개선 ▶사회적 의식 전환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화여대 박정수 행정학과 교수는 “돈이 없어 전문대학원이나 유학 가기 어려운 저소득층 자녀는 기업이 원하는 스펙을 갖추기 힘들다”며 “단기적으로는 취업 후 학자금 상환 제도를 확대해 저소득층의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홍두승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와 대학이 지역 균형과 사회적 배려 선발을 동시에 적용해 배려해야 한다”며 “대학이 점수로만 신입생을 뽑지 말고 소외 계층 속에서 우수한 인재를 찾아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개인의 능력이 대입 선발과정에 반영되려면 현행 점수 위주의 선발체제는 한계가 있어서 제도 수술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서울대 김대일 경제학과 교수는 “예전에는 머리가 좋으면 형편이 어려워도 성공할 가능성이 컸으나 요즘은 개인의 노력이 현실적인 장벽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대학들이 시험 등수로 평가하기 때문에 사교육에 의존한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받는 일이 벌어진다”며 “독서를 강조하고 발표나 생각하기 등을 입시의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넣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기업의 채용 방식에 대한 주문도 있었다. 성신여대 강석훈 경제학과 교수는 “삼성에서 강의하다 보면 특정 대학 출신뿐 아니라 다양한 인재들을 많이 만난다”며 “아이폰으로 유명한 애플은 삼성보다 더 다양하게 인재를 뽑아 아이디어로 승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도 간판이나 성적만 보고 뽑을 게 아니라 능력과 자질 등을 종합적으로 검증하는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강홍준·김성탁·이원진·박수련·김민상 사회부문 기자, 이종찬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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