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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바람따라] 동해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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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단풍 걷힌 동해안은 다시 초록이 살아 온다. 길섶의 가을 새싹, 산죽(山竹), 해송의 완고한 푸르름이 바닷물빛과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갯바위에 부딪힌 파도의 포말처럼 아름다운 감동이 일어나는 바닷길 한복판 자리잡은 울진.삼척은 선뜻 나서기 어려운 먼 곳이다.

그러나 국도 7호선과 해안도로가 헤어졌다 만나기를 거듭하면서 북상하는 길은 관동팔경중 3경을 끼고 있어 늦가을과 잘 어울리는 여로다.

*** 단풍 뒤 되살아난 초록

후포항 어판장을 구경하고 등대로 올라가면 작은 공원이 있다. 시야가 탁 트여 해맞이에 제격이다. 다시 해안길을 달려 월송리에서 국도 7호선과 합류하고 이내 월송정 입구 솔숲에 닿는다.

월송정은 관동팔경중 가장 남쪽에 있는 정자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보면 정자 앞에 숲 대신 넓은 백사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소나무에 둘러쌓여 바다를 조망하는 옛 맛을 잃었다.

그러나 월송정 뒤로 나가면 드넓은 갈대밭이 조성된 석호(潟湖)가 기대 이상의 풍광을 자랑하며 반긴다.

월송정 다음 마을(구산리)에서 해안길로 들어섰다가 국도변의 사동리에 이르면 고가(古家) 몇 채가 눈에 들어 온다.

맨 위에 1588년 지었다는 해월헌(도문화재자료 제161호)이 있다. 동해안 옛 사대부 집의 본보기로 꼽히는 집이다.

망양리~오산항~진복리~산포리 망양정까지 이어지는 18㎞ 구간은 마을마다 생선 말리는 채반과 줄 맨 바지랑대가 늘어서 있어 어촌마을의 정겨움을 가득 담아올 수 있다.

그리고 줄지어 있는 해안절벽의 아름다움은 초겨울 여행의 보너스다.

겸재와 단원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를 보면 망양정은 해안 벼랑 위에 있다. 둔덕 위에 있는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원래 망양정은 망양휴게소 자리에 있었다. 1858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을 읊은 1580년의 관동유람 때 월송정까지는 가지 않고 망양정에서 절창(絶唱)을 마쳤다.

그는 "바다 밖은 하늘이요 하늘 밖은 무엇인고…" 라고 드넓은 바다의 서정을 노래했다.

지금의 망양정도 올라 보면 불영천.왕피천이 합쳐져 바다로 흘러 드는 곳에 형성된 넓은 백사장, 바닷가 절벽을 따라 띠를 두르듯 형성된 어촌들이 동해 푸른 물결과 깔깔대듯 어울려 있는 전망이 정겹고도 시원스럽다.

울진을 지나 죽변면 봉평리 초평교 건너 왼쪽 비각에는 법흥왕11년(524)에 세운 신라 최고(最古)의 비석 봉평 신라비(국보 242호)가 있다.

울진 원전을 지나 얼마 안가면 작년 겨울 동해안 산불의 상흔이 보이기 시작한다. 경북과 강원도의 경계 부근이다. 이곳에 조선시대 진상 미역으로 유명한 고포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길은 도계(道界)로 한 마을 사람들이 서로 다른 도민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마을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호산 쪽으로 나가는 해안도로도 좋다.

여기서 삼척까지는 바다를 굽어보거나 깊은 산길 같기도 한 국도 7호선이 외길로 나있다. 변화무쌍한 길가 풍경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갈남리 신남마을 해신당(중요민속자료 33호)은 동해안에 하나 남은 남근당(男根堂)이다.

이웃한 용화해수욕장은 백사장이 넓고 물빛이 고와 하와이 부럽지 않다. 맑은 날 북쪽 고개에 차를 세우고 보면 코발트색 물 속에 해초가 하늘거리는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다.

삼척 죽서루(보물 213호)는 관동팔경 중 가장 크고 유일하게 바다가 아닌 오십천 절벽 위에 서있다. 13세기 이전부터 있었다니 그 내력도 깊기만 하다.

죽서루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한옥 건축철학의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풍치 좋은 절벽 위에 자연암반을 주춧돌 삼아 건물을 짜 올렸다. 그래서 기둥 길이가 서로 다르고 2층 누대에 오르는 계단도 바위가 대신하고 있다.

*** "한번보면 딴 사람 된다"

누대에서 보는 백두대간의 준봉들이나 굽이도는 오십천 물길이 죽서루 벼랑 아래 고여 이룬 호수같은 수면에 비친 그림자가 아름답다.

하지만 고건축가들은 죽서교 건너 둔치공원에서 절벽 위 죽서루를 건너다 보는 풍광을 으뜸으로 친다.

늦가을 절벽 앞에 철새라도 한 마리 날아가면 산수화가 아닌 한 폭 선화(禪畵)다.

옛 사람이 관동팔경 지역을 일러 '한번만 거치면 저절로 딴 사람이 되고, 비록 10년 후라도 얼굴에 산수 자연의 기상이 있다(이중환의 택리지)' 한 뜻을 가 보지 않고야 어찌 알겠는가.

이택희 기자

<찾아가는 길>

죽서루:삼척터미널(033-572-3699)서 걸어서 10분.신남 해신당·봉평 신라비:삼척에서 근남·울진 방향 버스가 자주 있다.망양정과 해안길:울진(054-783-4141)에서 버스가 매일 매화∼덕신∼진복∼망양정코스 6회,노음∼망양정∼진복코스 7회 운행된다. 월송정:울진에서 평해·영덕 방면 버스 자주 있다.후포 해안길:평해(054-787-5703)에서 후포∼거일∼월송간 하루 9회 운행된다.

▶맛집=사동횟집(054-788-6517·경북 울진군 기성면)은 국도변에 있다.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앞바다에서 잡힌 잡어무침회 솜씨 하나로 30년 내력을 자랑한다.뼈 째 저민 생선 살을 접시에 수북이 깔고 숭숭 썬 야채와 초고추장을 얹어 낸다.2인분 한 접시 1만2천원.

주막식당(033-572-2222·강원 삼척시 남양동)은 소라찜의 명가다.17년간 한 자리를 지켜 온 집 주인은 소라찜이라는 음식이름을 처음 사용했다고 자부한다. 동해안에서 난 싱싱한 아구와 소라,이 지역의 질 좋은 고추·마늘만을 사용해 맛이 깊고 시원하다. 값은 1만5천∼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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