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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들의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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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봄이 오고 있지만 얼음이 녹고 있는 강을 아직 다 건너지 못한 상황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최근 경기를 진단하면서 자주 하는 말이다. 강을 건너고 있는데, 얼음이 쩍쩍 갈라지고 있다면 얼마나 위태로울까.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지만 아직 만족스럽지 않고 유가나 원자재 가격같이 우리가 통제하기 힘든 불안 요인이 있다는 것을 경계하자는 취지다. 통계수치를 줄줄이 나열하는 것보다는 더 간결하고 메시지 전달에도 효과적이다. 지난달에 그는 “서비스산업 발전을 위해 ‘정책의 루비콘강’을 반드시 건너야 한다”는 말도 했다.

함축적인 의미 전달을 위해 고사성어도 곧잘 인용된다. 윤 장관이 지난 연말 직원에게 보낸 편지에선 ‘해현경장(解弦更張)’이란 말이 나온다. 올해도 녹록지 않은 한 해가 될 것인 만큼 선현들처럼 ‘풀어진 거문고 줄을 다시 고쳐 매는’ 자세로 긴장을 늦추지 말자는 당부였다.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지난달 농업인들과 만나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마부작침(磨斧作針)’의 마음가짐으로 올해를 농어업 혁명의 해로 만들자고 했다. 어려운 일이지만 끈기 있게 노력해보자는 스스로의 다짐일 수 있겠다.

반면 모호한 단어를 사용해 그 뒤에 숨으려는 모습도 있다. 부처 공식 문서엔 참 ‘공무원스러운’ 말들이 눈에 띈다. 올해 어느 경제부처의 업무 추진계획을 들여다보니 ‘제고’ ‘활성화’ ‘확충’ ‘추진 검토’ 따위의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과연 얼마나 높이고 얼마나 활성화하겠다는 뜻일까. 정책 목표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한 부분이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가 1984년 ‘말의 성찬(盛饌)’이란 제목의 본지 칼럼에서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공무원 보고서에서) 애용되는 낱말들은 흔히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별로 내용이 없거나 뜻의 전달이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활성화’ ‘확충’ ‘내실화’ 등의 단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뜻인지 모호하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났건만 관가의 모습은, 적어도 보고서의 풍경만 봐선,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해외용 말과 국내용 말이 달라 문제가 되기도 한다. 지난주 이명박 대통령의 BBC 회견 내용을 청와대 대변인이 톤다운해서 국내 언론에 전달해 구설에 올랐다.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민감한 대목을 감안했다고 하지만 이야말로 대표적인 공급자 위주 마인드다. 곧 전 세계에 알려질 내용을 우리 국민에게만 ‘정갈하게’ 재포장해 전달할 이유는 없다. 그대로 전하고 배경 설명을 덧붙이는 편이 나았다. 좀 거칠게 김현을 인용하자면 ‘말들의 풍경’이 계속 덧칠되고 자주 변하는 건 인간의 욕망 탓이란다.

서경호 경제부문 기자